[표창원의 단도직입]가해자가 된 피해자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2014. 9. 2.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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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현장에서 발견하는 가장 슬픈 모습은 '피해자'였던 자가 다른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로 변해 있는 상황이다. 어린 시절 이웃집 아저씨에게 성폭행당한 후 학교폭력과 군대 내 따돌림을 차례로 겪으며 영혼이 황폐해진 정남규가 선택한 복수극은 아무 죄 없는 여성들을 향한 잔혹한 연쇄살인이었다. 국내외 대부분 연쇄살인범의 과거에는 유사한 학대와 폭력 피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국민적 분노를 야기한 '28사단 윤 일병 사건'의 주범 이모 병장 역시 후임병 때는 스스로 병영 내 따돌림과 가혹행위의 피해자였다고 주장한다. 우리 옛말에도 '구박받은 며느리 엄한 시어머니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난 8월22일, 네덜란드 국적의 유대인 하요 메이어가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저명한 학자도 정치인도 부자도 아닌,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서는 이유는 바로 "인종학살,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이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가해자로 변해 있다"고 비판하며 '시오니즘 반대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이스라엘 극우 정치인들이 홀로코스트 피해를 이스라엘 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 축출의 명분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메이어의 생전 주장들은 일제강점 피해와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외국인 이주민들에 대한 학대와 착취,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막말과 비하와 조롱, 군대와 학교 등 각종 '조직'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권력적 폭력과 가혹행위들, 그리고 만연한 아동학대와 가정폭력. 언제든 누구든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리고 특성이나 행동의 어떤 측면에서든 비난할 여지만 발견된다면, 기다렸다는 듯 모든 공격과 폭력을 퍼부어대는 우리들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많이 닮아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에서 학살자로 변한 시오니스트'의 모습 말이다. 물론 아무 죄 없는 이스라엘 청소년을 납치해 끔찍하게 살해한, 하마스로 대표되는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테러와 범죄는 처벌받아야 한다. 시리아와 이라크 등에서 극단적인 가학적 살인행각을 저지르는 '이슬람 국가(IS)'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또한 이스라엘과 미국 등 서방 측의 가해와 침략과 탈취와 핍박 '피해'를 내세우며 무고한 약자들을 대상으로 '가해'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모두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중에서 폭력 반대 혹은 추방 운동에 나서는 이들도 많다. 그 스스로 나치에 의해 납치된 후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에 갇혀 부모가 학살되는 참상을 목격하는 고통스러운 피해 경험을 했던 메이어가 대표적이다. 그가 택한 길은 다른 피해자를 찾아 분노를 쏟아내는 '시오니스트 복수극'이 아니라, '절대로 되풀이돼선 안된다(Never Again)'는 외침이었다. 나치 범죄의 가해자들을 찾아 법과 절차에 따라 처벌하며 정의를 구현하는 것과 홀로코스트 피해 경험을 내세워 다른 대상에게 똑같은 가해 행위를 하는 것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이성의 고백이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쉽고 편한 집단주의적 삶이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자기 반성의 '피곤한 삶'이었다.

감정대로, 집단 이기의 편리함 속에 숨어, 다른 대상에게 마구 분노를 표출하며 사는 것은 너무 쉬운 삶이다. 대한민국, 보수 혹은 진보, 경상도 또는 전라도, 남자나 여자, 조직이나 집단 등의 울타리와 동질감 속에서 충성과 동료애로 자신이나 같은 편의 잘못과 가해 행위를 묻고 감추며 책임을 회피하는 삶은 너무 편안한 삶이다. 하지만 그 쉽고 편한 삶은 결코 '왜 사는지', '왜 사람인지'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삶의 가치'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지금 나는,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아야 할 때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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