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법살인'은 이미 무효.. 대법원 판결은 '무죄' 하나뿐이다

이범준 기자 2012. 9. 1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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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박 후보 역사 왜곡"

인혁당 사건 판결이 2개라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발언과 관련해 법조계에서는 박 후보가 형사사법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박 후보가 말하는 두 가지 판결은 1975년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과 2007년 서울중앙지법의 재심 무죄 판결이다. 박 후보는 하나의 사건에서 두 개의 결론이 났으니 최종 결론은 역사에 맡기자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한번은 박정희 정권, 다른 한번은 노무현 정권 당시 판결이 내려진 점을 들어 정권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판사들은 "인혁당 판결은 재심으로 원심을 취소했으므로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또 재심 재판은 결론이 명백하게 부당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하기 때문에 정치적 논쟁거리도 될 수 없다고 평가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재심을 열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항소심에서 무죄로 바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법적으로 분명한 잘못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안정성까지 포기해가면서 재심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혁당 사건은 재심 무죄까지 엄격하고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1975년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 재판에서 8명에게 사형, 17명에게 무기징역 등을 선고했다. 유족들은 27년 만인 2002년에야 재심 개시를 청구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조사자료가 근거였다. 법원은 한동안 시간을 끌다가 2005년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이어 2007년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됐다.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유족별로 30억원대의 배상도 받았다.

이 사건을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박 후보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1975년 사형 확정 판결이 나올 당시의 사건은 증거뿐만 아니라 재판 자체도 엉터리였던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법원이 재심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반성과 사과가 없었던 것을 비판받았을 정도다.

재심 판결은 1975년 당시 수사에 고문과 구타가 동원됐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에는 하급심 비상보통군법회의에 대해 '중립성과 독립성을 갖춘 사법기관이라고 볼 수 없고 …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반대신문권이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1975년 대법원은 비상보통군법회의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른 사법부 관계자는 '역사의 판단' 발언에 대해 "미국의 '이노센스 프로젝트' 같은 단체는 23년 전 성폭행 사건 당시 보관된 증거의 유전자(DNA)를 감식해 무죄를 밝혀냈다"며 "이런 것이 역사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인혁당 사건은 재심 무죄 선고의 증거가 너무나 명확하다"며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발언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11일에는 '역사의 판단'을 얘기한 이유로 '최근의 여러 증언'을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실체가 없다는 평가다. 2007년 인혁당 재심 무죄 판결 이후 새로운 증언은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박 후보자가 1964년 중앙정보부에서 대학생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지명수배한 1차 인혁당 사건과 혼동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박범진 전 신한국당 의원은 "인혁당 사건은 사실이다. 나도 서울대 시절 참여했다"고 밝힌 바 있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사형이나 중형이 선고되지 않은 전혀 다른 일이다.

<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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