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린 눈물로 배를 띄웠습니다"..근로정신대 할머니의 한

2015. 6. 2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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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중공업 상대 손배소 승소한 양금덕 할머니 진술서

미쓰비시 중공업 상대 손배소 승소한 양금덕 할머니 진술서

(광주=연합뉴스) 손상원 기자 = 1944년 5월 전남 나주초등학교.

6학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금덕이의 교실에 마사키 도시오 교장이 헌병 곤도를 데리고 교실에 들어왔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체격이 좋고 머리가 좋은 아이가 일본에 가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에도 보내준다. 돌아올 때는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올 수 있다"며 일본에 갈 사람은 손을 들라 했다.

금덕이의 친구들은 손을 들며 서로 가겠다고 아우성쳤다. 교장은 담임교사에게 머리 좋고 건강한 10명을 고르도록 했고 첫 번째로 지목된 학생이 급장인 금덕이었다.

꿈만 같았다. 무엇보다 여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금덕이는 자랑하듯 부모에게 말했지만, 아버지는 뜻밖에도 역정을 냈다.

일본에 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고 여학교에 보내준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금덕이는 중학교 보내줄 형편도 안 되면서 일본에도 못 가게 한 아버지를 한없이 원망하며 다음날 담임교사에게 일본에 갈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 사실이 보고됐는지 마사키 교장은 교실에 와서 "지명을 받고도 안 간다고 하면 아버지를 잡아 가두겠다"고 윽박질렀다.

금덕이는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 어느날 베개를 쌓아 올라서서 손을 뻗어 선반 위에 놓인 아버지의 도장을 가져다가 담임교사에게 전달했다.

부모의 '형식적 동의'를 갖춘 금덕이는 5월 말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주역으로 출발했다. 6학년 학생 10명, 1년 선배 7명, 2년 선배 7명이 있었다.

기차에 있는 금덕이의 눈에는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역으로 뛰어나온 부모가 보였다. 금덕이는 부모에게 끌려갈까 봐 몸을 숨겼다가 기차가 출발하고서야 얼굴을 내밀었다. 기차 밖 어머니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목포에서 출발한 여학생들을 싣고 온 기차는 광주, 순천을 거치면서 여학생들을 차례로 태웠다.

얼추 150여명이 여수항을 거쳐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 기차를 타고 나고야의 미쓰비시 중공업 도토쿠(道德) 공장에 도착했다.

나고야의 첫 며칠은 달콤했다. 나고야 성, 신사 등을 구경시켜줄 때만 해도 금덕이는 '일본에 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여자 근로정신대 대원들은 중대 단위로 편성됐다. 1중대인 전남 출신은 목포 1소대, 나주 2소대, 광주 3소대, 순천 4소대, 여수 5소대로 구성됐다. 금덕이는 2소대 4분대 분대장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공장으로 이동해 오전 8시부터 하루 8~10시간을 일했다. 작업 시간에는 가미가제(神風)라고 적힌 머리띠를 이마에 둘러야 했다.

금덕이는 시너와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 녹을 닦아내고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는 일을 맡았다.

훗날 결혼해서 밥을 태운다고 곧잘 구박받았던 금덕이는 당시 시너의 독성으로 냄새를 잘 못 맡게 됐기 때문으로 믿고 있다.

추운 겨울에도 장갑 하나 없이 찬물에 손을 담그느라 손등은 갈라졌고 찢어진 곳에서는 피가 그칠 날이 없었다.

일본인 반장은 수시로 작업장을 오가며 감시했고 키가 닿지 않아 발뒤꿈치를 들고 페인트칠을 하느라 다음날 아침이면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가장 힘든 건 배고픔이었다. 보리 섞은 밥에 단무지가 전부였고 어쩌다 된장국이나 정어리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 사람이 버린 잔반통에 손이 가거나 단무지를 훔쳐 먹었다가 물을 들이켜대느라 설사가 멎지 않을 때도 있었다.

1944년 12월 7일 점심을 먹고 작업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지진을 겪었다.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이었다.

금덕이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광주·목포·나주 출신 동료 6명을 잃었다. 그때 다친 옆구리에는 아직도 상처가 선명하다.

해방 후 나주에 도착한 것은 1945년 10월 22일. 막 기차로 나주역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와 친구 어머니 3명이 마중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 딸을 기다리느라 날마다 역을 찾았었고 아버지는 몸져누웠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금덕이는 맞선도 봤다. 그러나 어디선가로부터 일본에 갔다 왔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가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결혼날짜까지 잡았다가 그르친 경우도 있었다. 모두 금덕이를 일본에 가서 몸 팔다 온 여자로 알았기 때문이다.

21살때 소개로 만난 남성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다정한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뒤늦게 동원 사실을 안 남편의 오해와 구박으로 짧았던 행복은 무너졌다.

남편이 숨진 뒤 아이들을 키우려 시장에서 장사라도 나갈 때면 "저기 위안부 할머니 지나간다"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위안부가 아니라 일만 하다온 근로정신대라 말해도 누구 하나 믿어주지 않았다.

23일 광주고법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항소심 승소판결을 받은 양금덕 할머니의 진술서에 담긴 눈물겨운 삶의 모습이다.

양 할머니는 "그동안 쏟은 눈물만 해도, 배 한 척은 띄우고도 남았을 것"이라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몸입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미쓰비시는 빨리 사죄하세요"라고 진술서를 끝맺었다.

양 할머니는 호적상 84세, 실제로는 86세다.

sangwon7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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