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극우', 결국 통했다

파리·최현아 편집위원 2012. 5. 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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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차 대선 투표는 드라마틱했다. 사르코지가 2위로 전락하면서 31년 만에 처음으로 현역 대통령의 재선 실패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좌파는 좌파대로 미테랑 대통령 후 17년 만에 좌파 정권을 수립할 기회를 맞으면서 어느 때보다 사기가 충만해 있다. 그런데 마냥 승리의 달콤함에 도취할 수만은 없는 복병이 나타났다.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18% 지지를 얻으며 대선의 돌풍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2002년 대선 결선에 올랐던 자신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보다 더 많은 유권자로부터 표를 얻었다.

반(反)사르코지 정서 드러낸 투표 결과

이번 선거에서 무엇보다 가장 뚜렷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르코지를 반대하는 민심이다. '블링블링 대통령'이라는 별명과 함께 화려한 언변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사르코지. 그러나 그의 독단적인 정치 스타일에 프랑스 국민은 서서히 지쳐갔다. 또 부자감세 정책 등 서민과 거리를 둔 정책으로 그의 지지도는 나날이 떨어졌다. 급기야 유럽발 경제위기와 더불어 악화된 경제 상황이 국가 신용등급 강등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민심은 이탈했다.

선거 기간에 툴루즈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하고 반이슬람 정서가 대두되면서 사르코지 지지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듯했다. 그러나 5년 동안의 실정(失政)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제난과 높은 실업률에 고통받던 유권자에게 사르코지의 정책은 공허한 구호로 와 닿았다. 급기야 2007년 사르코지에게 표를 던졌던 지지자조차 이탈하면서 그는 1차 투표에서 2위로 밀려나게 됐다. 결국 이번 투표는 실망스러운 현 정권에 대한 심판 심리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반(反)사르코지 정서의 최대 수혜자는 사회당이었다. '변화는 바로 지금'이라는 사회당 후보 프랑수아 올랑드의 구호는 프랑스인의 정권 교체 욕구와 맞아떨어졌다. 그가 내건 긴축재정 반대와 일자리 창출, 부자증세 따위 정책은 사르코지 정부에 지친 서민층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당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극우파의 약진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18%의 지지를 얻은 국민전선은 지금까지의 대선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프랑스에서 역대 극우파가 이렇게 강력했던 적은 없었다. 1차 투표에서 얻은 지지도로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은 2차 결선투표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국민전선을 지지한 유권자의 향방이 대선 승부를 가르는 열쇠가 된 셈이다. 1차 투표가 끝나자 프랑수아 올랑드와 사르코지는 국민전선 유권자를 끌어안기 위한 구애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에 오른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왼쪽)와 2위를 차지한 사르코지 대통령.

프랑스에는 그동안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내건 극우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존재했다. 2002년 대선 투표에서 우파인 자크 시라크와 극우파인 장마리 르펜이 결선에 오르자 극우파를 반대하는 대중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극우파 정권 수립에 대한 우려가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극우파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은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분위기가 이번 투표를 통해 확인된 셈이다.

이번 대선에서 르펜을 지지한 유권자 유형을 보면 노동자 29%, 상인 26%, 월급생활자 22%, 농민 20%로, 국민전선이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표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폭넓은 계층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린 르펜이 당 대표를 맡으면서 이미지 쇄신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근엄함을 없애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전통적인 극우파 지지자인 남성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여성, 서민층, 월급생활자들까지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서민을 중심으로 파고든 국민전선

전문가들은 마린 르펜의 성공을 반사르코지 정서의 결과물로만 간주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국민전선 지지는 경제위기, 유로존, 정치 시스템 등 좀 더 본질적인 정책에 대한 동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문조사 기관인 이포프(IFOP)에 따르면, 마린 르펜을 지지한 유권자의 60%는 국민전선이 그들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나머지 40%는 마린 르펜을 당선시키기 위해 투표했다고 답했다. 이는 극우파 지지가 단순한 항의의 표시에서 정책적 지지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린 르펜의 정책은 네 가지에 기초한다. 반이민·안전·유로존 탈피·구매력 향상이다. 특히 반이민과 안전 문제는 국민전선의 가장 중요한 테마로, 이들은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한 이민자가 증가하면서 사회 안전이 위협당하고 일자리 역시 줄어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또 경제활성화 대책으로 유로존 탈피와 보호주의 정책을 내세운다. 이를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구매력 향상을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공약은 높은 실업률에 지친 프랑스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경제위기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인 노동자와 서민층에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비단 프랑스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경제위기 이후 오스트리아·핀란드·덴마크·스웨덴·스위스·헝가리 그리고 유럽연합이 상주하는 벨기에에 이르기까지 극우파의 영향력이 광범위하게 커지면서 이를 염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1930년 경제불황 시기에 독일·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극우 파시스트가 등장하고 이들의 확장이 세계대전이라는 극단적 파멸로 이어졌던 역사적 경험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유럽의 극우파들은 유럽연합 탈피와 보호주의 정책 강화라는 공통분모를 내세우는 만큼 유럽연합에도 위협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유럽연합은 사르코지가 선거 기간 반이민·반이슬람 등 극우적인 민족주의와 솅겐협정(유럽 내 이동 자유화를 보장한 협정) 수정 등 공약을 내세우면서 극우파의 주장에 공모한 것이 결국에는 유권자들을 마린 르펜으로 향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마린 르펜을 성공시킨 주역은 사르코지라는 것이다.

유럽 극우파들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국민전선은 프랑스 정치계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소수 정당으로서만 머물러왔다. 그런데 이번 투표에서 드러난 국민전선의 선전은 극우파가 더 이상 변방에 머물지 않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인 10명 가운데 2명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점, 이번 선거가 일깨워준 충격적인 현실이다.

파리·최현아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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