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만 죽게 생겼다"

2015. 4. 2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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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리스트만 남고 구체적 진술은 없어 증거 확보 어려워진 검찰 여론은 압박하고 있지만 살아 있는 권력에 칼 댈 수 있을지는 미지수

그때도 그룹 회장이 입을 열면서 사달이 났다. 2003년 2월 SK해운 분식회계 사건으로 서울지검에서 조사받던 손길승 그룹 회장은 비자금 일부를 여야 대선자금 지원 명목으로 건넸다고 진술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이를 내사 중인 사실이 2003년 8월29일 <한겨레>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대선자금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애초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에 선을 그었다. 당시 정대철 민주당 대표가 검찰 소환을 앞둔 2003년 7월11일, 굿모닝시티 윤창렬 대표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2억원을 받아 대선자금에 보탰다고 폭로하자 검찰은 "굿모닝시티 커넥션에 국한해 수사할 것"이라고 했다.

12년 전과 겹치는 검찰 풍경

하지만 대검 중수부의 내사가 공개되자 불법 대선자금의 전모를 밝히라는 여론이 달아올랐다. 검찰은 수사가 공개되고 두 달이 지난 2003년 11월3일 SK그룹을 포함한 5대 그룹으로 대선자금 수사 범위를 넓혔다. 추가 단서는 없었지만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대선자금 수사가 전 국민적 성원을 받았고, 자금을 건넨 이들도 살아 있었다. 검찰은 9개월 동안의 수사를 마치고 2004년 5월21일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불법 대선자금 823억원, 113억원을 모금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치인 30여 명과 기업인 20여 명이 기소됐다.

하지만 2002년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모금에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용두사미 수사'라는 뒷말이 나왔다. 그때도 검찰이 "증거가 없다"고 하면 "(수사) 의지가 없다"고 읽혔다.

'성완종 리스트' 수사는 2003년 대선자금 수사와 발단은 비슷하지만 검찰의 사정은 꽤 달라 보인다. 자금 공여자가 목숨을 끊었고, 증거를 제대로 확보하기도 전에 수사가 공개됐다. 수사 초기부터 검찰 안팎에선 비관적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자금 공여자가 자살하면서 검찰 입장에선 답이 없는 사건이 될 수 있다. 검찰만 죽게 생겼다."(2003년 대선자금 수사팀 관계자) "정상적 수사가 아니다. 자금 공여자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부장검사) "당장 다른 기업 수사로 확대하기엔 단서가 없어서 힘들 거다. 경남기업 자금을 중심으로 볼 수밖에 없다."(특수부 검사 출신 변호사)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은 2003년 못지않다. 매일 '성완종 리스트' 관련 증언과 의혹이 쏟아지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진실 공방에 사활을 거는 모습도 2003년과 유사하다. 2003년 7월 정대철 민주당 대표의 불법 대선자금 폭로로 궁지에 몰리자, 여당과 노무현 대통령은 '이참에 여야 모두 대선자금 내역을 공개하자'며 역공에 나섰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를 거부하고 여당의 불법 대선자금 모금에 대한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그해 12월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한나라당이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을 트럭째 건네받은 정황이 드러나자 여당은 '차떼기당'이라며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검찰 수사가 불공평하다며 '전면적·무제한적 특검'을 도입하자고 응수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가 쓴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 은퇴를 하겠다"며 배수진을 쳤고,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수사 지침을 내린 꼴이라며 반발했다.

부담스러운 여론의 관심

성 전 회장이 여권 친박계 정치인들에게 로비한 정황이 연일 드러나자 최근 여당은 반격에 나서고 있다. 새누리당은 성 전 회장이 2007년 특별사면이 됐을 때 참여정부가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당시 이명박 당선인 쪽의 '작품'이라고 반박했다.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도 사태 규정에 나섰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지난 4월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불법 정치자금 전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수사 확대 필요성을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튿날 이완구 국무총리의 사의 표명에 대해 "총리의 고뇌를 느낀다"면서 "정치 개혁 차원에서 확실히 수사하라"고 주문했다. 장관과 대통령이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범정치권 비리 사건으로 규정하자 새정치민주연합은 반발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지난 4월23일 "정권 차원의 불법 정치자금의 문제"에 대해 "특검을 통한 진실 규명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런 정치권과 여론의 관심은 수사 초기 수사팀엔 악재다. 첫 수사 대상에 여권 실세들이 올라와 있는 상황도 부담이다. 수도권 지역에 근무하는 한 부장검사는 "과도한 여론의 관심을 받으면 수사팀이 수사 논리대로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국민은 리스트에 등장한 인물들이 다 돈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법적으로 입증하기 만만치 않은 상황에 수사팀의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여권 실세 수사는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을 주변 인물 누구까지 할지를 정하는 문제에서부터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정치권과 여론이 뒤에서 떠밀며 수사를 촉구하고 있지만 정작 검찰은 증거 확보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상황은 2010년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수사 상황에 빗댈 만하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당시 부장 김기동)는 2010년 7월21일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에게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3차례에 걸쳐 9억여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한 전 총리를 불구속 기소했다. 당시 검찰은 자금 조성 및 전달 경위에 대한 한 전 대표의 상세한 진술과 자금 조성을 담당한 한신건영 경리부장의 진술, 접대비 세부 내역 컴퓨터 파일, 계좌추적 자료 등을 확보했다. 하지만 자금 공여자로 지목된 한 전 대표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면서 유일한 직접 증거인 공여자 진술이 휴지 조각이 될 상황에 놓였다.

1심에서 한 전 총리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장부와 9억원 조성 내역 등은 자금 조성에 관한 증거일 뿐 그 자금이 한 전 총리에게 전달됐는지 여부를 증명하는 물증이 아니다. 유일한 직접 증거인 한 전 대표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자금 공여자인 한 전 대표가 2007년 3월 국민은행 계좌에서 발행한 1억원권 자기앞수표가 한 전 총리의 동생 한선숙씨의 전세자금으로 쓰인 정황 등에 비춰 한 전 대표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다고 본 것이다. 자금 공여자의 진술 번복으로 생긴 입증의 공백을 정황증거로 메운 셈이다.

측근들의 입에 기댈 수밖에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은 한명숙 전 총리 사건 수사 때와 달리 자금 공여자인 성 전 회장의 상세한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 성 전 회장은 언론 인터뷰와 메모지를 통해 '누구에게 언제 얼마를 줬다'는 간단한 말만 남겼을 뿐이다. 수사팀으로선 자금 공여자의 빈자리를 채울 객관적 자료와 주변 인물들의 진술 등 정황증거 확보에 목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수사팀은 지난 4월23일 증거인멸 혐의로 성 전 회장의 측근인 박준호 전 상무의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이용기 비서실 부장을 긴급체포했다. 이들이 성 전 회장 자살 전에 같이 금품 로비 증거를 모으고 대책회의를 했을 것으로 보고 이들의 입에 기대를 걸고 있다. 2010년 한 전 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수사팀 관계자는 "(성완종 리스트 수사도) 자금 조성 경위는 어느 정도 확인되겠지만 결국 돈이 어떻게 전달됐느냐가 문제다. 성 전 회장이 남긴 말들은 구체성이 떨어져서 일단은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전달된 자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등 정황증거를 최대한 수집해서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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