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아베는 역사와 대면하라'는 미국 언론의 충고

이성철 기자 입력 2015. 4. 21. 09:36 수정 2015. 4. 2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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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날씨가 들쭉날쭉이다. 따뜻한 햇살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가 싶더니 곧 찬바람과 싸늘한 빗줄기에 봄은 오간 데 없다. 봄이 온 듯 아닌 듯 춘래불사춘이다.

다음 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와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을 둘러싼 기류가 그렇다.

의회와 행정부, 워싱턴의 싱크탱크들은 환영 일색이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목소리가 증폭돼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 뉴욕 발로 따끔한 질타, 충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베 씨와 일본의 역사 (Mr. Abe and Japan's History)'라는 제하의 뉴욕타임스 사설이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일본의 과거사와 직면하라는 무거운 제언이다.

일본 총리로는 사상 처음으로 미 의회 상하원 합동 회의 연단에 서게 됐지만 그 성패는 누구보다 아베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조언이기도 하다.

몇 단락만 그대로 옮겨 본다.

'...그러나 방문의 성공은 또한 아베가 과연 또 얼마나 정직하게 일본의 전시 역사에 직면하는가에 달려있다. 그것은 전쟁을 벌이기로 한 결정, 중국과 한국에 대한 잔혹한 점령, 잔학 행위, 그리고 수천명의 여성을 전시 매춘굴에서 성노예 또는 "위안부"로 일하도록 강요한 노예화를 포함한다...'

사설은 "지금쯤이면 그러한 역사는 해결되었어야 한다"며 문제 해결을 지체하고 있는 아베와 그의 정치 세력에 책임을 지웠다.

'...해결되지 못한 것은 대체로 역사에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심지어 다시 쓰려고 하고 지역 긴장을 부채질하는 아베와 그의 우익 정치 동맹의 잘못이다...'

사설은 아베가 전쟁에 대한 반성(remorse)을 공개적으로 표현했고 성노예를 포함해 침략에 대한 일본의 과거 사과들을 존중할 것이라고 말한 점을 언급했지만, 그것이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아베의 태도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언급에 모호한 수식어들을 붙임으로써 사과들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희석시키려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수정하도록 함으로써 "역사를 희석시키려 한" 일본 정부의 잘못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정치 지도자와 정부, 우익 세력을 싸잡아 비판했다.

아베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미일 방위협력 지침이든 TPP 환태평양 무역 협정의 진전이든 성과를 내려면 결국 역사 문제를 놓고 어떤 기조를 잡느냐에 달려 있다는 결론이다.

● "위안부 디스하는 맹독성 총리"

포브스와 파이낸셜 타임스 편집장 출신 칼럼니스트인 이먼 핑글톤(Eamonn Fingleton)은 하루 전 경제 전문 포브스지에 아베와 그를 초청한 의회 지도부를 통렬히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위안부 여성들을 '디스(diss)'하면서 일본의 맹독성(toxic) 총리에게 영합한다'는 제목이다.

처칠, 드골, 라빈, 만델라, 바웬사, 아키노 같은 존경받을 인물들의 독보적인 클럽에 아베를 불러들여 "미 의회 연설이라는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렸다"고 베이너를 질책했다.

한 단락만 인용한다.

'...무엇보다 아베는 "위안부"라는 표현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일본제국군의 성노예를 보통 매춘부로 묘사해 왔다. 산더미 같은 증거들이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핑글톤은 1940년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붙잡혀 성노예 상활을 강요당한 여성들의 증언을 그 증거의 하나로 들었다.

아베의 주요 의제는 "사과 안하기(unapologize)"라고 꼬집었다. 겉으로 사과하는 척 하면서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과는 커녕 오히려 이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핑글톤은 아베를 초청한 베이너의 결정을 머니 - 돈이라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의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돈으로 굴러가는데 일본만큼 의회에 그린백 즉 달러를 쏟아 부은 나라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직접 하든, 미국 내 투자 기업을 통해서 하든 로비가 먹혔다는 말이다.

● 중국이 싫은 일본, 일본이 좋은 미국

핑글톤의 칼럼에는 점잖은 사설 류의 글에서 볼 수 없는 통쾌함이 담겨있다. 주장의 근거들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아 정색하고 뉴스화 할 성격의 글은 아니지만 서구인들 생각도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경제 전문가인 핑글톤의 경제결정론, 경제환원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국제정치적 현상에는 여러 수준의 요인들이 작용한다.

미국과 일본의 찰떡 공조는 큰 틀에서 전후 70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침몰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적 열세, 미일 동맹을 통한 탈출이라는 구조적 변화, 국제정치적 배경이 우선이다.

미국 중심의 국제통화기금 IMF와는 별도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AIIB라는 '딴살림'을 차린 중국을 보라! 전후 70년 만의 국제경제제도의 개편도 같은 맥락이다.

AIIB를 거부하는 아베는, 조지 W. 부시 때 네오콘들에 휘둘려 중동으로 다 떠나갔다가 아차 싶어 아시아로 회귀하는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Asia rebalancing)' 정책에 둘도 없이 고마운 존재다.

존재감 없던 일본 지도자들하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난감해하다 '딱 부러지는' 지도자가 나와 자위대가 아닌 군을 갖겠다고 하고, 미군기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 벗고 나서고, 미일 방위협력 지침 개정에 찬동하고, 무기 박람회까지 열겠다고 하니 미 행정부든 의회든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오죽하면 상원 군사위원장 존 매케인이 '아베를 열렬히 숭모한다 (a great admirer)'고 공개 고백을 했을까.

진보 성향의 오바마 대통령이 극보수의 아베 총리와 서로 통할 정체성(identity)도 없어 보이지만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공유할 이익이 작지 않다. TPP는 강력한 전략적 의미를 가지며 아시아 재균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 있고, 항공모함을 하나 더 만드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애쉬턴 카터 미 국방장관이 예찬했듯이 아태 지역 안보 동맹, 특히 미일 동맹의 지지대와도 같다.

일본 외무성의 사이키 아키타카 사무차관은 워싱턴에서 한미일 외교차관급 대화를 마친 뒤 아베 총리가 연설문에 무엇을 담을 지는 초안을 보지 못해 알 수 없다며 한국 취재진의 질문을 피해갔다. 아베 총리가 '미국 정부와 의회에 잘 보였으니 그만'이라고 마음을 굳혔다면 큰 착각이다. 뉴욕타임스 사설을 필두로 한 언론과 지식인, 그리고 미국민들의 역사 문제에 대한 생각을 똑바로 읽고 역사에 남을 의회 연설문의 퇴고를 거듭하기를 권한다.

▶ 미국 언론들, 아베에 일제히 "과거사 사과하라"

▶ NYT "아베, 일본 전쟁범죄 정직하게 마주하라"

이성철 기자 sbschu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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