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리콴유 배출한 '객가인', 그들의 성공 비결은?

권종오 기자 2015. 3. 2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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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별세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국장(國葬)이 내일(29일)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거행됩니다. 리콴유는 31년(1959-1990)의 장기 집권 동안 강력한 리더십으로 1인당 국민 소득을 무려 100배로 늘리며 '싱가포르의 기적'을 이끈 주역입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은 최고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 법학과 출신인 리콴유에 대해 "수에즈 운하 동쪽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리콴유 국장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하는데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다른 나라 정상급 지도자의 장례식에 직접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1979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10일 전에 만난 외국 지도자가 바로 당시 싱가포르 총리였던 리콴유였습니다. 리콴유의 아들은 리셴룽 현 총리.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부녀 대통령'이 탄생했고 싱가포르에서는 '부자 총리'가 배출된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양가의 관계가 매우 돈독한 것도 박대통령이 싱가포르행을 결심한 배경으로 보입니다.

리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공과(功過)와 국민의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히 엇갈리는 지도자입니다. 경제 성장을 정치 발전보다 우선순위에 두었고 서구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고 '개발독재' 체제 아래에서 언론 자유를 통제하는 등 여러 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싱가포르 국민과 세계 주요 언론들은 대체로 업적이 과오보다 훨씬 많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리콴유가 어떤 인물이고 싱가포르가 어떻게 경제 발전을 이뤘는지를 새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방의 유태인'으로 불리는 '객가인'(Hakka)들의 성공 비결을 단편적이나마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중국 사회문화를 전공할 때부터 이 문제는 늘 저의 관심사였습니다. 2005년 호주에서 연수했을 때를 비롯해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크게 성공한 '객가' 출신 중국 화교들을 만나 직접 인터뷰한 적도 있습니다.

먼저 '객가족' '객가인'이란 말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용어부터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객가'(客家)는 글자 그대로 '손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한 지역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손님같은 사람들', 다르게 말하면 '이주민'이란 의미입니다. '객가족' 사람들이 '객가'를 '하카'로 발음하기 때문에 '하카족' 또는 '하카인'이라고도 부릅니다.

'객가인'이 언제부터 형성됐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합니다. 어떤 역사학자는 한족의 송나라가 여진족인 북쪽의 금나라에 침략당한 12세기 초부터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르면 15세기, 늦어도 명-청 교체기인 17세기에 중국 화북 지방이나 중원에 살던 사람들이 각종 전쟁과 민란, 홍수, 가뭄 등의 재난을 피해 푸젠성(복건성)과 광둥성(광동성) 등으로 이주했다고 말합니다. 중국 남부 지역에 정착한 이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동남아로 대거 이동해 그곳에서 '화교 자본'을 형성하게 됩니다. 현재 중국 대륙에만 약 7,000만 명, 홍콩, 타이완, 마카오 등지에 2.000만 명,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 80여 개 국에 4,000만 명 등 총 1억 명이 훨씬 넘는 '객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객가인' 출신 중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정치가와 막대한 부를 쌓은 화교 거상(巨商)들이 즐비합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물론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등소평(덩샤오핑), '중국의 국부' 손문(쑨원), 타이완 총통을 지냈던 이등휘(리덩훼이) 같은 사람들이 모두 '객가인'(하카인) 후예들입니다. 현재 동남아 경제를 쥐었다 폈다 하는 사람들이 화교들인데 이 화교 거상(巨商)들의 주축도 바로 '객가인'입니다.

이처럼 '객가인' 가운데 역사에 남을만한 걸출한 인물이 그렇게 많이 나온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들에게서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의 열쇠 중 하나는 '객가인'의 본거지로 불리는 중국의 푸젠성(복건성)에 있는 특유의 주거 공간 '토루'(투러우, 土樓)에 있습니다. 마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외형에, 대도시도 아닌 산악지대에, 그것도 몇 백 년 전에 흙으로 지은 건축물에 아직도 수백 명씩 함께 단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토루'는 '천원지방' 사상,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 표현된 대표적인 건축물로 우물이 있고, 바람이 불어 습하지 않은 곳에 주로 지어졌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이 자라기 좋은 조건을 지닌 땅을 고른 것입니다. 하카족의 '토루'는 생활공간이나 주거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외적의 침입을 막는 성벽 역할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객가인'들은 교육비를 공동 부담하고 육아를 서로 대신 해주는 등 모든 일을 상부상조하면서 이곳에서 오랫동안 동고동락했습니다. 이런 전통과 관습을 통해 '객가인' 특유의 정신 이른바 'Hakka Spirit''가 형성됐습니다. '객가인' 정신은 리콴유가 즐겨 사용한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적 가치'의 큰 줄기는 '유교적 가치'입니다. '객가인' 정신의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족 간의 화합, 조상과 전통을 중시한다

2.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한다

3. 이념보다는 실리에 중점을 둔다

4.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근검과 청렴을 실천하다

5. 상호 신뢰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다

6. 자기 정체성을 지키되 타인도 적극 포용한다

7. 옳다고 믿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추진한다

8. 부모는 자녀 교육에 힘을 쏟는다

'객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를 하면서도 자신들의 고유 방언인 '객가어'를 지켜왔습니다 "'조상의 땅은 팔 수 있어도 조상이 물려준 언어는 버릴 수 없다"는 강한 정체성으로 어디를 가나 그들은 '객가 연합체'(Hakka Syndicate) 구축을 통해 무서운 단결력을 과시했습니다.

'객가인'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전통과 정체성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과의 융화에도 뛰어난 적응력과 포용력을 발휘했습니다. 호주에 사는 '객가인'들의 영어 실력은 원어민 수준이고 독일에 가면 독일어를 그만큼 능숙하게 합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은 확실히 지키면서도 타민족과 교류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자신들이 속한 지역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공동이익과 지역발전을 위해 힘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말레시아에 사는 '객가인'들의 경우 콸라룸푸르 지역 사회에 자선행사가 있을 경우 그들은 말레이시아인보다 앞장서 거액의 기부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객가인'들을 보면 막대한 부를 쌓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부분 검소하고 소탈한 사람이 많습니다. 돈 자랑을 쉽게 하지 않고 허례허식을 무척 싫어합니다. 또 최고 권력을 잡아도 "내가 죽거든 내 집을 헐어버려라"는 리콴유처럼 평생 청렴을 실천하고 부정부패에 대한 강력한 척결 의지를 보였습니다. 싱가포르의 '태형'(笞刑)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자기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과 자녀에 대한 교육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한국은 싱가포르 못지않게 1960년대 이후 비약적인 경제 성장으로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칙을 무시한 편법, 부정부패, 황금만능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하면서 현재 사회적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제시한 '객가인'의 특징을 한국이 전부 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일부는 우리에게 당장 필요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견선여갈'(見善如渴)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의 좋은 점을 보면 목마른 것처럼 바로 따라하라는 뜻입니다.

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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