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었던 광장엔 기념사진 관광객만

입력 2009. 6. 4. 15:33 수정 2009. 6. 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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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모종혁 기자]올봄부터 중국 인터넷 공간은 반계엄 상태다. 지난 3월부터 세계 최대 동영상 공유사이트인 유튜브(YouTube)는 중국 내에서 수시로 접속이 안 되고 있다. 야후의 사진 공유사이트인 플리커(Flickr)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검색 사이트 구글의 블로그 서비스(Blogger)는 아예 접속이 봉쇄됐다. 중국 누리꾼 중 구글 블로그 이용자는 대략 20만 명에 달한다. 이달 초부터는 중국 내에서 단문서비스로 인기 있는 트위터(Twitter) 사이트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검색엔진 빙(Bing)도 차단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인터넷 사이트를 대거 차단하는 이유는 오늘로 6·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항쟁 20주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중국 정부는 톈안먼 항쟁에 대한 논의를 막기 위해 6천여 사이트의 게시판을 폐쇄했다.

톈안먼 광장 일대를 수시로 순찰하는 중국 군인들. 중국 정부는 6·4 톈안먼 항쟁 20주년을 앞두고 광장의 감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 모종혁

톈안먼 항쟁 20주년... 중국 인터넷은 '반계엄' 상태

중국 정부의 정보 통제는 인터넷 상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달 25일 홍콩 <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 는 "중국 일부 지방정부가 언론매체 관계자들을 긴급 소집해 부정적인 뉴스, 특히 사회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뉴스는 절대 보도하지 말라는 보도지침을 내렸다"고 폭로했다.

중국 정부의 이러한 보도지침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관련 보도에 그대로 적용됐다. 중국 언론매체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는 한국인들의 다양한 활동을 축소하거나 은폐했다. 분향소를 찾은 추모객의 숫자는 봉하마을을 찾는 사람으로 한정시켜 보도했다.

한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우고 운영한 시민 분향소에 대한 소식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중국 누리꾼은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시민 분향소의 조직과 운영, 그에 대한 단상을 적어 올렸지만 게시물은 곧바로 삭제됐다. 한국의 건전한 시민사회와 민주적인 정치의사 표현을 찬양하는 글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도 강화됐다. 중국정부는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비서를 지낸 바오퉁(鮑?)을 베이징 밖의 모처로 데려가 구금하고 있다. 톈안먼 항쟁에 참여해 수차례 투옥된 장치성(江棋生)은 자택에 공안이 상주하며 24시간 밀착감시를 당하고 있다. 장은 작년 말 중국의 민주화와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반체제 지식인들의 서명운동인 '08헌장'을 주도했었다.

톈안먼 항쟁에서 사망한 학생들의 유족 모임인 '톈안먼 어머니회' 대표 딩즈린(丁子霖)도 공안의 철저한 감시 아래 구금되어 있다. 톈안먼 항쟁 부상자들을 치료한 군의관 장옌융(蔣彦永)은 언론 접촉이 금지됐다.

톈안먼 광장으로 향하는 탱크 대열을 정지키신 한 젊은이. 선두에 있는 탱크 승무원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 뒤 끌려나왔다. 이후 그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뉴욕타임스

1989년, 한 정치지도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항쟁

그렇다면 중국 정부를 이토록 긴장케 하는 6·4 톈안먼 항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톈안먼 항쟁은 한 정치 지도자의 죽음이 도화선이 됐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후는 인민해방군 전신인 홍군에 투신하여 대장정에 참가하고, 중국공산당 청년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을 세우고 발전시킨 대표적 개혁파였다.

타고난 청렴결백과 실사구시, 친민(親民) 정신으로 무장한 후의 일생은 많은 중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덩샤오핑(鄧小平)이 후계자로 발탁했던 후는 1986년 12월에 일어난 대규모 학생시위를 옹호하다, 1987년 1월 자기비판서를 쓰고 총서기직에서 쫓겨났었다.

인민의 존경을 받던 후야오방이 죽자, 4월 17일부터 수많은 대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애도 집회를 열고 중국정부에 후의 복권과 민주화를 요구했다. 18일에는 1000여 명의 대학생이 중국 지도자들이 사는 중난하이(中南海)에 집결해 연좌농성을 벌였다.

중국 정부는 후의 영결식이 있는 22일을 앞두고 시위를 금지하고 톈안먼 광장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수만 명의 대학생들이 먼저 광장을 점거하고 평화시위에 돌입했다. 중국 정부는 26일 당 기관지 < 인민일보 > 를 통해 대학생들의 시위를 '국가를 전복하려는 반사회주의, 반공산당 동란'으로 규정했지만, 시위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5월 들어 시위 군중은 더욱 늘고 다양해졌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민, 노동자, 대학교수, 언론인 등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5·4 운동 기념식에는 20만 명의 시위대가 참여해 톈안먼 광장 주변을 행진했다.

중국 정부와 언론의 매도가 갈수록 격렬해지자, 13일부터 3000여 명의 대학생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5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이 정부 통제에 항거하면서 시위 현장을 보도했다. 17일과 18일 톈안먼 광장에 모여든 시위자는 100만 명을 넘었다. 이에 19일 밤 자오쯔양 총서기는 단식 농성자들을 전격 방문해 눈물로 단식 중단을 촉구했다.

민주화 시위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중국 정부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불러들였다. 계엄군은 2주일여 동안 톈안먼광장에 진입하려 했지만, 시민과 노동자들이 적극 저항하여 허사에 그쳤다. 5월 말 몇몇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정부에 대화를 요구했지만, 중국 정부는 반응이 없었다.

6월 3일 밤 비극이 닥쳐왔다. 수십 대의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은 거리에 있는 모든 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했다. 계엄군은 4일 아침 대대적인 진압에 나서 톈안먼 광장을 평정하고 학생들이 세운 자유의 여신상을 박살냈다. 밤늦게까지 광장과 시내 곳곳에선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병원은 사망자와 부상자로 넘쳐났다.

광둥(廣東)성 선전(深?)시 중심가에 설치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유록 선전판. 덩은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추앙받지만, 군대를 동원해 자국민을 학살한 죄는 면하기 어렵다.

ⓒ 모종혁

보수파가 격화시킨 시위, 광주항쟁 못지않은 비극으로 마감

숱한 혈흔이 톈안먼 광장과 베이징 전역에 뿌려졌지만, 희생자 수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톈안먼 항쟁의 희생자가 300명 안팎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월 19일 홍콩에서 < 역사의 대폭발 > (歷史的大暴炸)을 펴낸 장완수(張萬舒)는 희생자 수를 구체적으로 추산해 관심을 모았다. 장은 톈안먼 항쟁 당시 중국 관영 < 신화통신 > 의 국내뉴스부 주임이었다. 그는 저서에서 중국 적십자사 고위간부의 말을 인용해 민간인 713명과 군인 14명 등 727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무력 진압을 위해 동원한 군 병력이 1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같은 달 14일에는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회고록 < 국가의 죄수 > (The Prisoner of the State, 중국어판 '改革歷程')가 출판되어 곧바로 매진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자오쯔양은 톈안먼 광장의 무력 진압을 결정한 덩샤오핑에 반기를 들었다가 권좌에서 쫓겨나 가택연금을 당하다 2005년 1월 사망한 비운의 정치가다.

< 국가의 죄수 > 는 자오쯔양이 생전 몰래 녹음한 30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절친한 친구 3명을 통해 중국 밖으로 반출하여 출판한 것이다. 자오쯔양은 회고록을 통해 실각 20년, 사후 4년 만에 격정적으로 톈안먼 항쟁의 진상을 공개했다.

회고록에서 자오쯔양은 톈안먼 항쟁이 파국으로 치닫게 된 원인은 당시 리펑(李鵬) 총리를 위시한 강경 보수파에게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시위 학생들은 관료 사회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의 일소, 당과 정부의 민주적인 운영,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해소 등 순수한 요구사항을 내걸었다"며 "이를 강경 보수파가 반사회주의, 반공산당 동란으로 매도하여 시위가 격화되고 규모도 커졌다"고 지적했다.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은 민주주의가 안정을 저해한다고 믿었기에 학생 시위에 대처하는 데 강경책을 선호했다"며 독재 유지를 위해 무력 진압을 최종 결정한 것은 바로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이라고 강조했다.

2001년 출판된 < 톈안먼 문건 : 자기 인민에게 무력을 사용한 중국 지도부의 결정, 중국어판 '中國六四眞相' > 에서도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독선과 그릇된 정세 인식이 잘 나타나고 있다. < 톈안먼 문건 > 은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부터 6월 4일까지 중국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회의 내용을 대화체로 기록한 절대기밀문서다.

덩샤오핑과 보수파는 톈안먼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군중시위가 사회주의체제와 공산당 독재를 붕괴시켜 권좌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며 우려했다. 그들은 시위의 배후에 미국 정부 및 CIA 뿐만 아니라 대만의 정보기관까지 나서서 지원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빌딩 숲으로 뒤덮인 중국 경제 1번지 상하이의 푸둥(浦東)신구. 요즘 중국 젊은이들은 공산당 독재 하의 경제성장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 모종혁

홍콩은 시위, 중국은 무관심... 톈안먼 항쟁 이대로 잊혀지나

대학생과 시민들의 순수한 민주화 열정을 압살한 톈안먼 항쟁 20주년을 맞았지만, 요즘 중국 젊은이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 양리주안(23·여)은 "누군가 캠퍼스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시위를 하자면 미친 놈 보듯 쳐다볼 것"이라며 "극심한 취업난으로 정치 문제에 관심 가질 여력이 전혀 없다"고 학내 분위기를 전했다. 공밍(26)도 "1980년 이후에 태어난 바링허우(80後) 세대의 가장 큰 관심사는 국가 경제의 발전과 개인 재산 불리기다"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 정치체제에는 별다른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무관심은 설문 조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난달 < 인민일보 > 가 5·4운동 90주년을 맞아 방문조사와 인터넷으로 1만2000여 명의 대학생을 설문조사한 결과, 대상자 중 28.9%만이 인생의 가치에서 사회에 대한 공헌이 우선한다고 답했고 48.2%는 건강하고 즐거운 생활이 매우 중요하다고 꼽았다. 응답자의 대다수는 중국에 자부심을 느끼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발전에 신뢰를 보냈다.

같은 달 22일 영국 < 파이낸셜타임스 > 도 유명한 블로거인 저우슈광의 말을 빌려, "바링허우 세대는 사회주의 전통 아래 자랐고 알고 있는 것도 그 틀 안일 뿐"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지난달 31일 홍콩 시민 8000여 명이 빅토리아 공원에 모여 톈안먼 항쟁의 정당한 평가와 중국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과 대비된다. 이날 시위는 20여 명의 홍콩 젊은이들이 주도했다. 홍콩학생연맹 소속 대학생 11명도 중심가인 타임스퀘어 앞에서 톈안먼 항쟁의 재평가를 촉구하면서 64시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같은 달 23일 미국 < 뉴욕타임스 > 는 "적지 않은 중국 대학생들은 톈안먼 항쟁이 너무 극단적이고 깊은 상처를 준 사건이어서 다시 되돌리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여긴다"면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에 대한 자부심도 과거에 대한 관심을 잃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의 철저한 보도 통제와 인터넷 검열, 극심한 취업난은 중국 젊은이들을 정치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있다. 피에 젖었던 톈안먼 광장도 기념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관광객들로 넘쳐날 뿐이다. 하지만 체제 비판의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중국 젊은이들은 사회 이슈와 민생 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의 인육검색(人肉搜索)을 통해 부패 관료의 신상자료를 공개하고 자연재해 현장에서 자원봉사로 적극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 고도 경제성장 속에 잠복되어 있는 사회참여의 열기가 경제가 침체되거나 정치적 이슈가 도출될 경우 언제든 폭발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내건 채 영업 중인 한 술집. 중국 젊은이들은 개인의 행복과 즐거운 생활을 중시하지만 사회 이슈와 민생 문제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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