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모함, 전투기.. 돈 되는 것은 다 팔아요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입력 2011. 10. 12. 09:24 수정 2011. 10. 12. 09:2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영국 정부는 20년 이상 장기근속 군인 38명을 해고했다. 경제위기에 허덕이던 영국 정부가 국방 예산을 대폭 줄이고자 이들에게 해고 통지를 한 것이다. 그것도 이메일로 해고를 일방적으로 통보해 군인들의 분노를 샀다. 영국군은 통상 군인을 해고할 때 인사부에서 해당 부대장에게 해고 사실을 알리고 부대장이 면담을 한 뒤 해당자에게 통보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사부에서 직접 대상자에게 일방적으로 이메일 통보를 한 것이다.

해고 통보를 받은 군인 중에는 최전선인 아프간에서 한창 목숨 걸고 탈레반과 싸우는 로열 탱크 연대 군인도 있다. 현재 아프간에서 복무 중인 영국군 장교는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탈레반과 싸우는 동시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이중 고통을 겪고 있다. 매일 아침 임무를 하러 가기 전 이메일을 열어보며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길 빌고 있다. 부대원들끼리 탈레반보다 해고 이메일이 더 무섭다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Reuter=Newsis 1985년 진수된 영국 해군의 항공모함 '아크 로열'(HMS Ark Royal R07)도 약 64억원에 팔릴 운명에 처했다.

이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앞으로 아프간에서 돌아오는 군인부터 감원 대상이 될 예정이다. 지금 한창 리비아에서 나토군 소속으로 작전 중인 영국 HMS 컴버랜드 프리깃함과 HMS 터뷸런스 잠수함에 승선 중인 해군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군은 이들이 리비아에서 작전을 끝내고 돌아오는 즉시 해고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해군과 육군, 그리고 공군도 각각 리비아 현지에 파견된 군인들에게 해고를 통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공군사관생도 100명 임관도 취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대영제국이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그동안 영국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만든 데는 국방 분야 비중이 컸다. 영국은 미국·중국·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의 국방 예산을 쓰는 나라이다. 영국 국방 예산은 2010년 기준 380억 파운드(약 68조9400억원) 수준이다. 그러나 영국은 재정위기를 겪으며 세계 수준의 군사력마저 포기했다. 영국 역사상 200년 만에 가장 젊은 총리로 꼽히는 데이비드 캐머런(45)은 당선되자마자 경제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과감한 재정 삭감의 칼을 들었다. 각 정부 부처 감축안에 이어 결국 국방 예산을 8% 삭감하는 방안까지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영국군은 2015년까지 군 내부 민간인 2만5000명과 병력 1만7000여 명을 줄일 계획이다. 국방 예산도 369억 파운드(약 66조원) 감축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병력이 총 589만명이었던 데 비해 현재 영국의 육·해·공군을 합친 병력은 총 17만5000명 정도밖에 안 된다. 그래도 영국 정부는 더 줄여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하고 있다. 캐머런 총리의 신임을 받는 조지 오즈번 재무장관은 "국방 예산을 앞으로도 최대 20%까지 줄이기 위해 이 정도 수준의 병력 감축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급기야는 군 당국이 전체 공군사관생도의 25%에 이르는 100명의 임관을 취소하기로 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지난해 10월19일, 캐머런 총리는 국방 예산 8% 삭감을 골자로 한 < 전략적 국방·안보 보고서 > 의 하원 보고를 하루 앞두고 영국 합동작전본부를 찾아 군인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쉽게 말해 예산 삭감을 앞두고 군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셈이다. 이 자리에서 크리스 워드 소령(37)은 캐머런 총리에게 "저는 해리어의 파일럿이고, 아프가니스탄에서 140번이 넘는 위험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총리님, 저도 잘리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일순간 침묵이 흘렀고 캐머런 총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아프간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살아 돌아왔지만 해고돼야 하는 비운의 장교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해고해야 하는 캐머런 총리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교차됐다.

영국군이 보유한 각종 물품을 파는 웹사이트(http://army-uk.com). 군용 지프차는 물론이고 고급 시계와 보석류도 판다.

군인 해고만이 아니다. 국방 예산이 대폭 삭감되자 영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최신형 무기를 포함해 돈이 되는 거라면 모두 대거 바겐세일 중이다. 영국 국방부는 이미 웹사이트에 매물 수천 건을 올려놓았다. 여기에는 과거 영국의 주력 무기인 섬유유리로 만든 수직 이착륙 해리어 전투기와 색슨 장갑차, 헬리콥터 등 육·해·공군을 총망라한 매물이 나오고 있다. 또 장갑 재규어 승용차와 군용 랜드로버 지프차 등 군용 자동차, 탱크까지 리스트에 올라왔다. 군이 보유해온 고급 시계와 보석류도 판매 대상이다. 시중 가격이 1000파운드(약 183만원)를 호가하는 고급 시계인 레이먼드 바일 탱고나 다이아몬드가 48개나 박힌 크리스천디오르 크리스털 시계 등이 대표적이다. 돈 되는 것이라면 모두 동원한 모양새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판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항공모함 'HMS 아크 로열'도 매물로 올라와 있다는 점이다. 1985년 진수된 아크 로열은 세계 최초의 현대식 항공모함으로 1990년대 발칸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 등에서 25년간 위력을 발휘한 영국 해군의 자존심이었다. 아크 로열이라는 명칭 자체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 제독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기함에서 딴 것이기도 하다. 이 항모는 당초 2015년까지 사용될 예정이었으나 조기 명퇴되어 350만 파운드(약 64억원)로 중고 사이트에 나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 해군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이 아크 로열을 사겠다고 나선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과 군 당국은 매매가를 놓고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의 해군 관리는 "아크 로열은 아직 실전에 투입해도 손상이 없는 명품 항공모함이다. 퇴역한다 하더라도 영국 박물관으로 가야 할 텐데 중국으로 갈 수도 있다니 가슴 아프다"라고 한탄했다.

영국은 그 외에도 해군이 사용하던 42형 구축함 3대를 각각 100만 파운드에 판매할 계획이다. 공군 또한 불과 3년밖에 사용하지 않은 최신형 전투기 '유로파이터 타이푼'까지 매각한다. 탱크와 중화기도 전체의 40%인 405대나 없애고, 해군 호위함과 구축함도 현재 23척에서 2020년 19척으로, 4척 줄일 예정이다. 이렇게 매물이 쏟아지다 보니 심지어 영국은 2020년 신형 전투기가 도입될 때까지 항공기 없는 항공모함을 유지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영국 정부가 자국의 자존심인 국방부 몸집을 줄여가는 과정에서 군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지난 5월 영국 의회 국방위원회에 앞서 열린 청문회에서 영국의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은 영국이 더 이상 모든 범위에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내란 진압을 위한 저강도 전투 병력에서부터 국가 간 전면전같이 대규모 병력을 필요로 하는 전쟁을 모두 수행할 만큼 군사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국방비 삭감은 이 문제를 더 심화시키고 군 내부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영국 비평가들도 우려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도 영국 전체 군사력이 미군 해병대 수준보다 낮은데, 이런 상황에서 국방비 삭감을 추진하면 군사력 격차가 너무 커져서 미국과 영국 양국 간 군사 협력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우리라는 이유에서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영국과 나란히 한길을 걸어온 미국도 걱정이 많다. 전 세계에서 수행해온 혹은 앞으로 수행할 여러 군사작전에서 미국이 가장 의존할 수 있는 우방국 영국이 제대로 병력을 파견해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칭송받던 영국이 이제는 재정적자라는 악재로 국방비 삭감을 하면서까지 아슬아슬하게 경제 침몰 위기를 버티고 있다.

"탈레반보다 해고통지가 더 무섭다"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Live - [ 시사IN 구독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