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롭게 살자더니.. "우리의 가치가 싫으면 떠나라"

이지선·김향미 기자 2011. 2. 15.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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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우파정부 '다문화주의' 정책 포기 '국가 통합'에 방점

영국과 프랑스, 독일 정상이 잇달아 '다문화주의의 종언'을 고하고 있다. 한 사회가 이민자들의 독특한 문화와 공존하는 형태의 다문화주의는 이민국가인 미국, 캐나다, 호주는 물론 세계화로 인해 이민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각국에서 이민자 정책의 근본 철학이 돼 왔다.

유럽 3국 우파정부 지도자들은 '공존'의 가치를 강조한 다문화주의를 실패로 규정짓고 '통합'의 가치에 방점을 찍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얼핏 이민자를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자성(自省)으로 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각에서 결국 소수 이민자 문화에 대한 '배제'로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음이 울리는 까닭이다. 정말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한 것일까.

유럽의 선언, 호주·캐나다로 확산

◇ 잇단 다문화주의 정책 실패 선언 = 지난 5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안보회의에서 영국의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이주민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문화를 인정해온 지난 30년 동안 젊은 무슬림들이 극단주의에 쉽게 빠져들었고 주류문화와 동떨어지는 상황이 연출됐다는 이유에서다. 캐머런 총리는 그러면서 '소극적인 관용' 대신 '근육질의 자유주의'를 강조했다. 이는 정부가 나서 이민자들로 하여금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국적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하겠다는 뜻이라고 로이터통신은 해석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지난 9일 TV방송 인터뷰에서 다양한 공동체가 더불어 존재하는 것은 실패했다고 밝혔다. 그는 "프랑스인들은 그동안 이민자의 정체성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정작 프랑스의 국가 정체성을 다지는 데는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해 10월 "다문화의 개념을 채택해 서로 행복하게 살자는 경향이 우리를 지배해 왔지만 이 개념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선언한 바 있다.

메르켈과 캐머런, 사르코지의 '다문화주의 실패' 발언은 1970년대 다문화주의를 처음 도입한 호주와 캐나다에도 영향을 미쳤다. 호주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캐머런 발언 이후 "호주는 다문화주의에 대해 더 여유로워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용광로에 냉기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논쟁은 특히 캐나다에서 가열됐다. 현지 일간 내셔널포스트는 사설에서 "캐나다의 지도자가 영국 정부의 기조와 같이 공식적으로 다문화주의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 다문화주의는 무엇이고 왜 실패했다고 하는가 = 다문화주의는 다양한 이민자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의 정책을 결정하는 핵심 가치다. 다문화주의 정책 개념을 처음 도입한 캐나다와 호주는 다른 문화적 특징을 가진 집단이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지혜롭다고 판단했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다원주의 이론으로, 일명 '샐러드볼' 또는 '모자이크 이론'이라고 불린다.

다원주의 이론에 앞서 이민자 정책을 지배했던 대표적인 이론은 '동화이론'으로, 미국에서는 서로 다른 이민자 집단이 이주 사회의 가치를 수용해 하나로 녹아들어 합쳐진다는 소위 '멜팅팟 이론'으로 통했다. 그러나 이는 고유한 문화적 뿌리와 풍습을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다름을 인정하되 조화를 이루자는 다원주의 이론으로 수렴됐다.

문제는 유럽의 많은 유권자들이 현재의 이민정책에 불만을 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유럽 협력촉진 단체인 독일마셜기금이 이달 초 미국과 유럽 6개국 국민 6000여명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각국 정부가 이민정책과 관련해 일자리 문제에 잘못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73%, 영국인은 70%로 나타났다. 이어 스페인인 61%, 프랑스인 58%, 네덜란드 54% 순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유럽의 경우 다문화주의가 유럽연합 이외의 국가에서 온 이주민을 사회로 통합하는 데 실패했으며,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우에는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이 같은 논란이 더욱 불거졌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민자 정책을 세우고, 유럽은 사회·정치적인 접근을 해왔다. 실제 마셜기금 조사에서도 미국인의 60%는 '이민자들이 미국 문화에 잘 융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독일인은 41%만이 '이민자가 독일 사회와 통합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독일의 경우 이민자를 무슬림으로 특정할 경우 그 수치는 25%로 떨어졌다. 유럽 정상들의 잇단 다문화주의 정책 포기 발언은 유럽이 더욱 사회·정치적인 시각으로 이민자 정책을 받아들인다는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더 이상의 톨레랑스는 없다? = 다문화주의 정책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국가 정상들의 발언을 잘 들여다보면 '변형된 멜팅팟'이 떠오른다. 사회의 공통된 가치를 내세워 '사회의 일부가 되고 싶으면 우리의 가치를 따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를 비롯한 문화적인 통합이다. 캐머런은 모든 이주자의 영어 사용 의무화를 위해 학교에서 영국 문화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메르켈도 "이주민들은 독일어를 배우는 등 사회 통합에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슬람 단체에 대한 지원 삭감(영국), 모든 이주민이나 영주권 취득 희망자들에 대한 '프랑스적 가치' 교육 의무화와 부르카 착용 금지(프랑스)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조치들은 겉으로는 사회 공통 가치로의 '통합'을 강조하고 있지만 맥락을 뜯어보면 따르기 싫으면 나가라는 식의 '배제'의 레토릭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메르켈의 발언 당시 독일 보수언론인 디 벨트는 "아무도 우리들 사이에서 일하는 이주민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이주민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주는 자신들이 선택한 나라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길 원하는 사람은 이 나라를 떠나라"고 노골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란 신문 시야사트 에 루즈는 "캐머런은 서구의 가치를 지키겠다며 다양성과 다문화주의 정신의 가면을 벗어던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00만명 이상의 영국 무슬림들은 테러리즘을 빌미로 수많은 권리를 빼앗기게 됐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최근 보수정권이 들어선 국가들에서 극우·민족주의적 정당들이 입지를 굳히는 상황이다. 중도우파 정당들도 유권자들의 표심을 의식해 반이민 정서에 편승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연구기관인 '센트리'의 하라스 라피크는 "영국 노동당 정부에서는 비폭력 극단주의를 지원하면 결국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를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보수당 정부는 이러한 접근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석했다.

이민 배제·소수인종 억압 우려

캐머런의 발언이 나온 날은 영국 극우단체인 '영국수호동맹(EDL)' 소속 3000여명이 루턴에서 대규모 집회를 벌인 날이었다. EDL은 외국인 혐오(제노포비아) 단체로 되레 영국 사회의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영국 평등·인권위원회의 트레버 필립스는 지난 7일 가디언에 "(통합을 핑계로) 무슬림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정치센터의 스티븐 필딩 소장도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캐머런이 보수당 내 우파를 의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르코지는 다문화주의와 관련해 500만~600만명의 무슬림을 특정하면서 "이슬람을 인정하지만 '프랑스식 이슬람'이 아닌 '프랑스 안에서의 이슬람'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르코지가 반이민자 정서를 부쩍 강조하는 것은 내년 5월의 차기 대선과도 무관치 않다. 두터운 지지층인 우파를 끌어안기 위해 소수인 이민자, 특히 극단주의로 묶기 쉬운 무슬림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독일에서도 집권 기민련(CDU)의 자매정당인 기사련(CSU)의 호르스트 제호퍼 당수 겸 바이에른주 총리가 "다른 문화권의 이민자들은 사회 융화가 어렵다"면서 터키와 아랍국들로부터 이민들을 더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 사용자연맹(BDA)의 디터 훈트 회장은 "숙련노동자들이 독일을 기피하는 현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 멜팅팟(용광로·Melting pot)

이민자가 사회와 어울려가는 상황을 일컫는 말. 이는 특히 미국으로 넘어온 이민자들에 대한 동화정책을 정의하는 데 사용된 용어로, 이들이 서로 어울려 통합되는 모습을 의미하는 비유로 사용됐다. 이 개념은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사회 안에서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다문화주의의 등장으로 도전받기 시작한다.

▲ 샐러드 볼(Salad bowl)

미국 사회의 다양한 문화가 샐러드처럼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을 말하는 개념. 각 문화가 하나로 녹아들었다는 의미의 '멜팅팟'과 달리 '샐러드볼'은 조화를 이루되 각각의 고유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캐나다에서는 '모자이크'라고도 불린다.

< 이지선·김향미 기자 jsle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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