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중덕이'와 '백구'를 만나다

2011. 12. 1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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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최경준 기자]

'해군기지 반대파' 중덕이(위)와 '해군기지 찬성파' 백구 ('잼 다큐 강정' 화면 캡쳐)

ⓒ 잼 다큐 강정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해군의 높은 울타리, 그 밖으로 내던져진 '해군기지 반대파' 중덕이의 애처러운 눈빛과 발목에 흰 붕대를 감은 '해군기지 찬성파' 백구의 모습이 느린 화면으로 흘러가면서 영화는 엔딩을 향해 달려갔다.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한 미국인 관객은 영화가 끝나자, 깊숙이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영화가 남긴 '미완의 감정'을 쉽게 추스르지 못하는 표정이다. 8명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달려들어 100일 동안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아직 완성된 게 아닌 듯 했고, 영화에 등장하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의 싸움 역시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스크린에는 제주도에 있는 고권일 제주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장과 평화활동가 최성희씨가 등장했다. 화상전화로 연결한 것이다. 직접 그들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서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고 있는 그 '미완의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거다. 강정마을 주민 사이에서 '구럼비의 여신'으로 불리는 최성희씨는 하와이에서 내려오는 전설로 그 답을 대신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뉴욕대학교 실버센터에서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강정마을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다룬 영화 '잼 다큐(Jam Docu) 강정' 상영회가 열렸다. 영화가 끝난 뒤, 제주도에 있는 고권일 제주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장과 평화활동가 최성희씨를 화상전화로 연결,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 최경준

"미국의 군사기지는 하와이, 오키나와, 괌, 제주도 등 아시아태평양의 여러 섬들과 연관 되어 있다. 왜 그럴까? 섬은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평화활동가들이 올 수 없다. 그런데 하와이의 한 평화활동가로부터 아름다운 말을 들었다. 아시아태평양의 모든 섬들은 푸른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설이다. 지리적인 고립을 극복하고, 바로 여러분께서 거기 앉아계시는 것처럼 영혼이 하나로 연결될 때, 진정한 연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LA, 워싱턴DC 등 미 전역에서 상영 추진... 조직 구성이 목표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강정마을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다룬 영화 '잼 다큐(Jam Docu) 강정' 미국 뉴욕 상영회 포스터.

ⓒ 노둣돌

제주도와 '푸른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겠지만,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 제주 해군기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연대 움직임이 본격화 되고 있다. 특히 뉴욕에서는 미국시민들과 각 나라에서 온 평화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강정마을과의 지속적인 국제연대 활동을 벌여나가기 위한 조직 구성을 추진 중이다. 이른바 '제주 구하기 행동 연대'(Save Jeju Action Committee)가 그것이다.

지난 15일(현지시각) 뉴욕에서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강정마을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다룬 영화 '잼 다큐(Jam Docu) 강정' 상영회가 열린 것도 이러한 활동의 일환이다. 맨해튼에 위치한 뉴욕대학 실버센터에서 열린 상영회에는 학생, 평화운동가, 뉴욕·뉴저지 거주 한인 등 120여 명이 참석했다.

뉴욕뿐이 아니다. 로스앤젤레스, 워싱턴DC,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시애틀 등에서도 영화 상영이 추진되고 있다. 각 도시에서 영화 '잼 다큐 강정' 상영회를 통해 제주 해군기지의 문제점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강정마을과의 연대를 위한 조직을 구성, 미 전역을 네트워크화 한다는 계획이다.

영화 상영회에 참석한 제이 하우빈(70, 컴퓨터기술자)씨는 화상전화로 연결된 고권일 위원장 등에게 "강정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적이고 창조적인 저항이 미국 사람들에게도 엄청나게 영향을 주고 있고 성공적이라는 것을 강정마을 주민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것이 당장 표출이 안 된다고 해도 앞으로 계속해서 도움이 될 것이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필리핀과 뉴욕을 오가며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베스 로드리게스(23)씨는 상영회 직후 기자와 만나 "오늘 영화 상영회의 이슈인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우리 필리핀에게도 굉장히 친숙한 이슈"라면서 "필리핀에도 미국의 군사기지들이 있었지만, 시민들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혀 폐쇄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이해한다"며 "필리핀인들은 강정마을 주민들의 싸움에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뉴욕대학교 실버센터에서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강정마을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다룬 영화 '잼 다큐(Jam Docu) 강정' 상영회가 열렸다.

ⓒ 최경준

뉴욕에서 '잼 다큐 강정' 영화 상영회를 기획하고 추진한 것은 미주 한인진보청년단체 노둣돌이다. 이 단체의 활동가 이주연씨는 "단순히 영화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강정마을과 꾸준히 연대투쟁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미국 내에서 힘을 모으는 게 목적"이라며 "제주 해군기지 문제에 관심이 있는 단체뿐만 아니라 개인, 예술가, 문화운동가 등을 모아서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래 '해군기지 찬성파'... 이 영화 보고나서 생각 바뀌었다"

'잼 다큐(Jam Docu) 강정'은?

"울지마 구럼비, 힘내라 강정!"

'잼(jam)'은 정해진 규칙 없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연주를 뜻하는 재즈 용어. 이 영화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을 마치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감독 8명이 각자의 시각으로 풀어냈다. 경순, 권효, 김태일, 양동규, 정윤석, 최진성, 최하동하, 홍형숙 감독이 바로 그 주인공.

'각자의 스타일대로 만들어, 이 마을에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빨리 세상에 알리자!' 촬영부터 완성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100일. 짧은 8편의 작품을 씨줄 날줄이 엮이듯 정교하게 묶어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해냈다. '잼 다큐 강정'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제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초청작이며 오는 22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된다. (출처 - '잼 다큐 강정' 제작노트)

한편 고권일 위원장은 영화 상영회에서 화상전화를 통해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이유 등을 설명했다. 그는 "제주 해군기지는 강정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가안보 사업이라고 되어 있지만 오히려 안보를 위협하고 동북아를 위험에 빠뜨리는 사업"이라며 "주민들의 민주주적인 동의절차를 밟지 않았고 마을의 천혜환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사업"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정부와 해군 당국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면서 주민들을 100여 명 넘게 사법처리하고 9명이 구속됐으며, 지금까지 벌금이 9000만 원이 넘었고, 손해배상청구 금액도 3억 원이 넘는 상황"이라며 "결국 정부는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서 폭력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저희들은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최성희씨는 "제주 해군기지는 공식적으로 남한 해군기지이지만 미국의 거대한 군사 전략에 포함된 것"이라며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배 전략은 경제적인 면에서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군사적인 면에서 기지 건설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기지 공사를 하고 있는 삼성건설을 압박하기 위해 삼성전자 불매운동을 벌이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고 위원장은 "삼성이 압박을 당하면 이 사업을 제고할 확률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삼성이 무기 산업에서 손을 떼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답했다.

고 위원장은 또 '제주 해군기지를 보는 중국의 견해는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중국의 한 신문 칼럼에서 '제주 해군기지는 중국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형국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제주도에 관광객을 보내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고, 최근 중국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경고 메시지를 조금씩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뉴욕대학교 실버센터에서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강정마을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다룬 영화 '잼 다큐(Jam Docu) 강정' 상영회가 열렸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 관객들과 함께 '제주 해군기지 반대' 상징물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최경준

제주도 서귀포시가 고향인 주이 성(27, 콜롬비아대 대학원생)씨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왔다. 성씨는 이날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상영회 직후 기자와 만난 성씨는 "이전에는 자기 고장만을 지키려고 한다는 생각에 강정마을 사람들이 편협해 보였다"면서 "그러나 오늘 영화를 보고나서 왜 그들이 그렇게 싸우고 있는지 이유를 알게 됐고,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해군기지 절대 반대'까지는 아니고, 중립적인 입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김진원(31, 뉴욕시립대 대학원생)씨는 "영화가 환경 문제, 미군 문제, 4·3 항쟁까지 여러 가지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어서 그 배경을 모르는 미국인이나 젊은 학생들에게는 조금 어려웠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영화 상영에 앞서 헨리 임 뉴욕대학 교수(동아시아학과)가 미국인과 학생들을 위해서 제주 4·3 항쟁에 대한 배경 설명을 간략하게 했지만, 매 영화 상영마다 이를 별도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씨는 "그러나 영화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 같다"며 "(미국인이나 학생들이) 8명의 감독들이 왜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가, 그 질문에 대해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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