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미우리 '전쟁책임' 최종 보고서] 전쟁당시 지도자 책임 日 언론으론 첫 규명 시도

2006. 8. 13.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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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내각 미국과 개전 주도 … 도고 외무 무능이 원폭 초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계기로 지난 1년간 대형 기획시리즈 '검증, 전쟁책임'을 게재해 온 요미우리(讀賣)신문이 그 최종보고서를 13일자에 발표했다. 최종보고서는 15일자 조간에도 나뉘어 실릴 예정인데, 일본의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등 A급 전범을 포함하는 전쟁 당시 지도자들의 책임 소재를 구체적으로 규명했다. 다음은 요미우리 검증보고서의 요약.

만주사변 전쟁의 출발점은 1931년 9월 발발한 만주사변이다. 주모자는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들의 침략행위는 문자 그대로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이시하라 사상의 핵심은 毅) 총리가 암살당하고 후임 내각은 만주국을 승인했다. 국제연맹의 조사단은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에 전달했다. 국제연맹이 총회에서 이 보고서를 토대로 권고문을 채택하자 일본 대표는 국제연맹 탈퇴를 통고하고 퇴장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중일전쟁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盧溝橋)사건이 발생한 것은 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 자체는 우발성이 많아 냉정히 대처했다면 본격적인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사실 4일 후인 7월 11일에는 현지 정전협정이 성립, 국지적으로 해결되는 방향으로 갔다. 그러나 같은 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은 중국 북부에의 파병 성명을 발표, 군사적 국면으로의 전환에 불을 붙였다. 고노에는 중대국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전쟁초기 중국의 국민당정부에 밀사를 파견하려 하는 등 평화를 모색한 것도 사실이나 육군 등의 반대에 부딪혀 무위가 됐다. 히로다 고키(廣田弘毅) 외무장관도 고노에와 함께 거의 침묵을 지켰다. 또한 중국 정부와의 평화교섭 중지를 주장했다. 화북(華北) 분리공작은 중국과 일본을 전면전으로 이끌었다. 공작의 중심은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봉천(奉天)특무기관장이었다.

미일 개전 개전 1년 전인 40년 말부터 제2차 고노에 내각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미국과의 교섭을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체결하는 등 위험한 길을 선택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무장관이 스탈린과 일소중립조약 체결(41년 4월)에 나서는 등 일본 외교에 균열이 생겼다. 마쓰오카는 민간 주도의 미일교섭에 강하게 반발했고, 육군도 평화교섭의 조건인 중국으로부터의 철군에 반대해 교섭은 암초에 부딪혔다. 미국과의 개전 결정에 대한 중요한 책임은 천황을 보필하는 도조 히데키 총리를 비롯, 외무장관인 도고 시게노리, 재무장관인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등 내각 각료에게 있다. 해군 연합함대사령관 아마모토 소로쿠(山本十六)는 투기적이라고도 평가 받을 수 있는 진주만공격을 감행했다. 선전포고가 현지 대사관의 착오로 늦어져 '비열한 일본인'이라는 비난을 초래하게 됐다.

원폭투하ㆍ소련 참전 도고 시게노리 외무장관은 소련과의 교섭에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도고는 평화교섭의 중개를 부탁하기 위해 45년 6월 3일부터 소련 대사와 협상을 시작했지만 7월 14일 끝날 때까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 늦어져 2발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초래했다. 6월 6일 열린 최고전쟁지도자회의에는 일본이 전쟁 수행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보고서가 제출됐다. 그러나 회의는 국민의 정신력을 고양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 전쟁 계속은 가능하다고 하는 전쟁지도대강을 결정했다.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 총리는 포츠담 선언에 대한 대응에서 커다란 실수를 범했다. 각의에서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의사는 없는 것으로 결정했지만 군부의 압력을 받은 그는 기자회견에서 "묵살한다"고 밝혀 원폭투하와 소련 참전의 구실을 주고 말았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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