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힐즈버러 참사', 27년 만에 '불법적 죽음"

고정애 2016. 4. 2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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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힐스버러 참사로 리버풀 팬 96명이 숨졌다. 희생자 중에는 어린이와 여성도 적지 않았다.[중앙포토]

"팬들은 잘못이 없다. 오히려 불법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1989년 영국의 셰필드에 있는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발생한 96명의 축구팬 사망 사건의 사인(死因)을 조사해온 배심원단이 26일 내린 결론이다. 당시 힐즈버러엔 리버풀FC와 노팅엄 포리스트FC간 FA컵 준결승전이 열렸다. 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2만5000여 명의 리버풀팬이 몰렸는데 경기 직전 입장하는 과정에서 96명이 압사했고 7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배심원단은 "당시 경찰 책임자가 팬들의 안전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중과실을 저질렀다"며 "팬들에겐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다. "긴급구조도 문제였다"고 봤다.

27년 만에 이 같은 결론이 내려지기까지 곡절이 많았다. 세 차례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들은 끈질히게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첫 사고 보고서는 1990년 나온 '테일러 보고서'였다 음주한 리버풀 팬들의 횡포가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란 결론을 냈다. 그 무렵 대중지 '선'은 “술취한 리버풀 팬이 횡포를 부렸고 구조활동을 벌이던 경찰을 폭행했다”는 소문을 실었다. 팬들을 난동꾼으로 몬 것이다. 유족들과 리버풀 팬들은 강력 반발했다. 그 덕분에 1997년 재조사가 시작됐으나 흐지부지됐다. 유족들은 지더라도 소송을 제기했다. 관련 문서 공개도 요구했다.

결국 2009년 12월 독립적인 조사위원회가 다시 꾸려졌다. 2년 9개월에 걸친 방대한 조사 결과 '결론'이 바뀌었다. 경찰이 문제였다. 이미 발디딜 틈이 없는데도 출입구를 개방했다. 이 때문에 이미 들어가 있던 입석 팬들이 떠밀렸고 급기야 압사까지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들이 리버풀 팬들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우려한 것도 드러났다. 긴급 구조가 제대로 됐더라면 40여 명은 구할 수도 있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사과했다.

2012년 고등법원이 재판을 다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사인조사 배심원단 평결까지 나온 것이다. 검찰은 추후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 두 딸을 잃은 트레버 힉스는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마침내 정의를 이뤘다"고 말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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