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에 몰린 IS, 테러로 건재함 과시

하영식 분쟁전문 저널리스트 2015. 11. 21. 1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합군과 쿠르드군 공세로 점령지에서 계속 밀리자 전 세계 대원들 사기진작도 겨냥

1992년 8월, 아주 젊었던 나는 답답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지하를 달리던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유리창 밖에 보이던 에펠탑의 거대한 크기는 사진으로만 접해 왔던 나를 경외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콩코드광장을 지날 때는 단두대와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로베스피에르 등의 이름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렇다!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의 최고 걸작품이다’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프랑스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비우기 위해 선전하는 에펠탑이나 향수, 와인보다는 프랑스 민중들이 피를 흘려 성공시킨 프랑스 혁명이 사실은 프랑스가 인류사에 기여한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지금도 전 세계인들이 배우고 실천하는 인류 역사의 소중한 불멸의 가치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11월 16일 정오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프랑스 국기를 잡고 사흘 전 ‘11·13 파리 연쇄 테러’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묵념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자유·낭만의 도시가 피·공포의 도시로 하지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는 마치 자유와 평등, 박애의 정신을 경멸하듯 파리에서 테러를 자행했다. 지난 11월 13일 밤(현지시간)에 자행된 테러공격으로 129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자유와 낭만의 상징이던 파리는 피와 공포의 도시, 무장군인들이 곳곳에 진을 친 계엄하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IS가 공개적으로 파리를 공격했음을 인정한 이틀 뒤 프랑스도 IS의 수도인 시리아 북쪽의 라카에 전투기를 동원해 무차별 보복공습을 퍼부었다.

파리의 테러공격으로 세계가 충격에 빠진 이유는 러시아의 민간항공기 폭파와 파리의 테러공격을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가 IS와 전쟁 중이라는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는 올해 9월부터 IS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면서 IS와 전쟁 중이었다. 파리 테러는 IS가 적의 후방을 쳤다는 의미다. 러시아의 민간비행기 폭파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IS처럼 잔인무도한 세력에게는 전쟁에서의 ‘제네바 협약’ 같은 룰을 기대할 수는 없다. 10월 31일에 IS는 이미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에서 러시아 관광객 224명을 실은 민간항공기에 폭탄을 심어 공중에서 폭파시킴으로써 수백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바 있다.

전선이 중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나 떨어진 후방인 파리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물론 IS의 주적은 미국과 러시아지만, 두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란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만큼 프랑스 정부가 IS를 과소평가하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실책을 저질렀다는 점이 지적돼야 할 것이다.

그럼, IS가 파리에서의 테러공격을 통해 노린 건 무엇인가? 11월 12일,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도시 신자르에서는 IS가 쿠르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퇴각했다. IS를 제거해야 한다는 국제 여론에 밀려 서방 연합군들과 러시아의 폭격, 쿠르드군의 공세 탓에 IS는 계속 점령지에서 밀려나면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파리 테러공격은 이에 대한 복수극 측면도 있다. 비록 신자르에서는 패배했지만 IS의 건재함을 외부에 과시하면서 사기를 잃어가는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시리아 여권을 자살폭탄 테러리스트 옆에 남겨놓으면서 난민들에 대한 유럽 사회의 포비아(공포증)를 조장할 목적도 있었다. 이를 통해 유럽인들과 난민들, 유럽의 기독교와 이슬람, 나아가 세계와 이슬람의 대립을 부추기려는 시도도 엿보였다.

대중들에게는 서방 언론인들을 잡아서 잔인하게 목을 치는 테러단체 정도로 알려져 있는 IS는 하루아침에 급조된 조직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이념과 역사성까지 보유하면서 재생산구조까지 갖추고 있는 무장조직이다.

2014년 6월 10일, IS는 북부 이라크의 모술(고대도시 니느웨)을 점령했고, 6월 29일에 그곳에서 ‘이슬람국가’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와 함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Al Bagdadi)‘를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도자인 칼리프(이브라힘 1세)로 발표했다.

어쨌든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이름도 없던 수니파 무장 그룹인 IS가 모술을 점령한 사건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당시 모술에는 3만명의 이라크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전투 한 번 제대로 벌이지 않고 IS에 100만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인 모술을 고스란히 내주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라크 병사들은 미국이 보급한 군수물자들과 최신식 무기들을 버려두고서 줄행랑을 쳐버려 모든 것이 IS의 수중에 넘어가버렸다.

이라크 북부도시 모술 점령 국가 선포 IS는 모술을 점령하고 미군들이 남기고 간 최신 무기로 무장한 뒤부터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의 무장부대인 ’페쉬메르가‘조차도 IS의 진격에 전혀 제동을 걸지 못하고 IS의 중무기에 놀라 도망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페쉬메르가 부대의 갑작스러운 후퇴는 페쉬메르가의 방어선만 믿고 피난하지 않고 남아 있던 쿠르드 민족의 한 줄기인 야지디족만 희생시킨 결과를 낳았다. 야지디족에 IS는 엄청난 재난이었다. IS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뒤 대량으로 학살당하고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은 모두 노예시장에 성노예로 팔려나가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피난으로 인해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피난민들 중 많은 사람들은 산에서 허기로 죽어가야 했다. 필자가 만났던 야지디 사람들은 산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던 가족의 얘기를 할 때는 북받치는 눈물로 인해 얘기가 아예 불가능했다.

2014년 말에 IS에 잡혀간 야지디 여인들 중 200여명이 풀려나오면서 IS의 행각에 대해 증언한 내용들은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IS의 행각은 마치 고대 노예시장을 방불케 하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22세의 한 야지디 여인은 22번이나 노예시장에서 팔려다녔고, 한 무슬림 지도자는 자신의 이름을 여인의 손바닥에 문신으로 넣어 자신의 노예임을 공공연하게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야지디 여성들이 성적인 학대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는 이들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머리를 가릴 때 사용하는 스카프를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하기도 했다.

야지디인들을 잔인하게 처형하고 비인간적으로 학대했던 IS의 수장은 박사학위까지 받은 무슬림 성직자로 알려졌다. 칼리프로 자칭한 IS의 지도자 알바그다디는 이라크 사마라 출신으로, 바그다드의 이슬람 대학에서 이슬람 종교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주로 모스크에서 설교를 하면서 조용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잔인한 조직의 수장이 될 수 있었는지가 의문점이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보이지 않는 성직자‘로 불렀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후 알바그다디는 본격적으로 지하드 운동에 뛰어들어 한 무장 그룹의 건설을 지원했다. 이 때문에 그는 2004년도에 미군에 의해 체포돼 캠프 부카에 수용돼 열 달 가까이 지냈다. 그곳에서 미래의 IS 지도자들 대부분을 만났고 조직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IS 조직의 최고지도자 9명이 그곳을 거쳐 갔다. 그곳에 들어온 대부분은 단순히 반미주의자로 미국에 테러를 가하거나 테러의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곳을 나갈 때는 모두 투철한 지하드 전사로 성장해 있었다. 캠프 부카는 ’테러리스트들의 대학‘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지하드의 학교로 유명해졌다. 알바그다디가 캠프 부카에 있을 때 맡았던 역할은 죄수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면 중재하는 심판관의 역할이었다. 이 때문에 미군들은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해 그에게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그는 마음대로 캠프의 아무 곳이나 방문할 수 있었고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이를 통해 갇혀 있던 많은 지하드 지도자들을 만나서 그곳에서 미래의 IS를 조직했다.

알바그다디가 건설한, 순수한 이슬람법이 적용되는 이슬람국가에 사는 점령지의 주민들은 어떤 삶을 사는지 필자는 그곳에서 탈출해온 난민들로부터 간략하게 들을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은 지옥과도 같은 삶을 강요당하면서 대부분 탈출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는 지난해 말 터키 남부 국경도시 수르츠로 들어온 난민들 중에서 IS의 수도 라카에서 탈출해 온 한 시리아 여성 ’제이나‘에게서 IS 치하에서의 삶을 잠시 들을 기회가 있었다.

파리 연쇄 테러를 저지른 시리아 내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에 대한 작전 수행을 위해 시리아 연안으로 가려고 모항인 툴롱 항을 떠나고 있는 프랑스의 핵추진 항공모함 샤를 드골 호. / AFP연합뉴스
점령지 시리아인 졸지에 2등 국민 전락 “시리아의 라카가 IS의 수도로 결정되면서 IS의 많은 외국인 전투요원들이 몰려들어 살고 있다. IS의 점령지역에 사는 우리 시리아인들이 한결같이 느끼는 것은 우리가 갑자기 이등 국민으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외국인들의 종이 된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모든 결정은 외국인들이 했고, 시리아 사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라크나 북아프리카, 유럽이나 걸프지역에서, 그리고 체첸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산다. 비록 모두가 IS에 속해 있지만 출신 국가별로 계급이 나눠진다. 일등 국민은 당연히 IS의 핵심 요원인 이라크 출신이며, 이등 국민들은 튀니지나 모로코, 체체니아 출신들이다. 체첸인들이나 모로코인, 튀니지인들이 시리아인들을 가장 잔인하게 대하고 있다. 그러나 사우디나 걸프지역,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 등에서 온 사람들은 시리아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줬다. IS 내에서도 지하드 사상으로 온 대원들이 있고, 반면에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온 대원들이 있다. 대부분 걸프지역에서 온 대원들은 시리아보다 훨씬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며 살다가 이데올로기에 이끌려 시리아의 전쟁터로 왔기 때문에 사실상 경제적 이익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당연히 시리아의 가난한 무슬림 형제들을 돕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반면에 체첸이나 튀니지, 모로코 등지에서 온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시리아로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쟁의 반사이익을 최대한 누리기를 원한다. 당연히 점령지에서는 무슬림 형제들이 아니라 단지 기세등등한 점령군으로 온갖 약탈을 포함한 잔인한 범죄행위로 지역주민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또한 IS에 속한다 하더라도 시리아인이면 가장 하층민으로 대우받는 게 IS가 점령한 시리아의 현실이다. 시리아인에 대한 차별은 전쟁터에서 드러났다. 2014년 10월부터 4개월 동안 시리아의 북쪽에 위치한 쿠르드족의 거주지 코바니에서는 쿠르드족과 IS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진 적 있다. 당시 IS에 속한 시리아 출신들이 가졌던 가장 강한 불만이 코바니 전투에서는 항상 시리아인들을 최전선으로 몰아넣어 전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시리아인들이 죽어나갔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IS 대원들은 모두 안전한 후방에 머물면서 전투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시리아를 탈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IS 대원들에게 당했던 악몽을 얘기하고 있다. 필자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쿠르디스탄으로 탈출한 이라크 난민인 이브라힘에게서 들었던 얘기다. 2014년 1월, 인구 20만명의 팔루자가 IS의 손에 떨어진 뒤, 20대의 두 딸을 둔 한 수니파 무슬림인 이브라힘은 IS 대원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다 결국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라크 북부의 쿠르디스탄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이웃 동네에 사는 잘 아는 두 여인이 IS 대원과의 결혼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민주화 두려운 수니파국가들의 지원 “한 번은 큰딸이 가까운 시장에 음식을 사러 갔다가 그곳에서 한 명의 IS 대원이 따라와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곧 IS 대원이 문을 두드렸고 내가 문을 열었다. 그는 내게 딸과 결혼하려고 딸을 데리러 왔다고 말했다. 또 딸을 데리고 가는 것은 합법적이며 자신은 그럴 권한이 있다면서 나를 협박했다. 그날 밤 나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고 아브라힘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IS의 탄생에는 2개의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된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011년 시리아에서 시작된 내전이다. 시리아에서의 내전은 중동에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이 근원이 된다. 당시 아랍의 봄으로 인해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는 살해당하거나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를 ’아랍의 봄‘이라 부르지만 현재는 IS의 준동 탓에 ’아랍의 겨울‘로 변하고 말았다.

IS를 공공연하게 뒤에서 지원하는 국가들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나 터키, 아랍에미리트연합, 카타르 등은 모두 수니파 국가들로서 민주화의 바람을 두려워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정책을 엄격하게 실행하는 국가들이다. 사실 IS가 점령한 곳에서는 민주주의나 자유, 평등이라는 단어조차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게 됐으며, 아예 이런 단어들은 금지어로 지정됐다. 당연히 이들 국가가 아랍의 봄을 잠재우기 위해 IS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지원하지 않았느냐는 의혹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리아에서의 내전은 이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그리 충격적인 사건은 아니다.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대 초까지 내전을 경험한 바 있는데, 당시의 집권자는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였다. 그는 1970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으며 소수 시아파인 ’알라위‘파 출신이다. 이 때문에 시리아에서는 다수파인 수니파에 의한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는 산발적인 무장투쟁이 이어지다 1979년부터 1982년까지는 수니파인 ’무슬림형제단‘이 주도하는 대대적인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결국에는 수천명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200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사망하고 젊은 후계자인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정권을 승계하면서 다시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는 비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으며 영국에서 살면서 서구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젊은 알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충만할 때였다. 또한 시리아에 들어선 새 정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대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를 ’다마스쿠스의 봄‘이라 부른다.

2011년 아랍의 봄을 틈 타 시리아에서 발생한 수니파의 봉기는 전 세계의 지하드 용사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중동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 아사드 정권의 붕괴를 갈망했던 미국과 유럽은 알아사드 정권에 맞서 싸우는 누구라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곧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전 세계에서 수니파 지하드 용사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튀니지, 모로코, 체첸, 사우디, 발칸지역이나 서유럽에 거주하던 ’무자헤딘‘들까지 모두 시리아로 물밀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이라크에서 미군에 눌려 몸을 사리고 있던, 나중에 IS의 모체가 되는 ’이라크이슬람국가‘라는 무장조직의 대원들도 시리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수만명의 지하드 전사들이 그룹을 결성해 반알아사드 전선에 뛰어들었고, 너도나도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지원 받기 시작했다.

<하영식 분쟁전문 저널리스트>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