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프란치스코 교황이 1980년 엘살바도르 우익 군사정권에 암살된 남미 해방신학의 상징적 인물인 오스카 로메로(1917~1980)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했다. 로메로의 죽음이 순교로 선포되면서 그 동안 해방신학을 마르크시즘으로 간주해 엄격하게 단속해 왔던 가톨릭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됐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3일 바티칸 시성성 회의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공포하는 안을 승인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지난 1980년 미사 도중 총에 맞아 숨졌다. 복자(福者)로 선포되려면 기적을 행한 사실을 입증 받아야 하지만 순교자는 그런 단계가 필요 없다.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8월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편에서 "로메로 대주교를 복자로 선포하는 것을 막던 교리적 문제가 이미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해결됐다"며 "시복 심의 절차가 교황청 시성성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교황은 당시 "로메로 대주교는 나에게 하느님의 종"이었다며 "그의 시복이 빨리 진행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서 2013년 5월 엘살바도르 대통령 면담 때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추진 의사도 밝혔다.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순교를 죽음으로 가톨릭 신앙을 지킨 경우로 한정한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목을 하다 죽어도 순교로 인정할 것을 검토하도록 신앙교리성에 요청해 순교의 개념을 확대했다.

로메로 대주교 시복을 둘러싼 신학적 쟁점은 그가 살해된 것이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난한 민중을 도우려는 정치적 행동 때문인지 가리는 것이었다. 남미 가톨릭 교회에서 태동해 크게 유행한 해방신학은 사회ㆍ경제적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 해방신학의 기수가 로메로 대주교였다.

로메로 대주교는 좌익 반군과 내전을 벌이던 우익 군사 정권의 인권 탄압과 독재에 공개적으로 맞서 싸우다 1980년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미사 중 총에 맞아 숨졌다. 2010년 첫 좌파 정권 탄생 직후 엘살바도르 정부는 그의 죽음에 공식으로 사죄를 했지만 여전히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이어진 엘살바도르 내전에서는 로메로 대주교 말고도 7만5,000명이 숨졌다.

바티칸은 그 동안 해방신학을 마르크시즘으로 간주해 엄격하게 단속해왔다. 해방신학에 대한 교황청의 부정적 견해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이끌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해방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성직자들은 정치적인 해석보다 기도를 통한 구원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프란치스코도 이전 교황과 다름 없다.

하지만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다 죽임 당한 성직자를 교회가 외면하는데 적지 않은 의문을 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 선포는 공식적으로 이름만 붙지 않았을 뿐 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마음에 이미 성인 반열에 있는 로메로를 뒤늦게 교황청이 인정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