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잊힐 권리'..인터넷 기록 지워야 하나?

서경채 기자 2014. 5. 1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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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힐 권리'(A right to be forgotten) 라고 들어보셨나요? 인터넷 검색으로 등장하는 자신의 개인 정보를 삭제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말합니다. 유럽에서 이것을 처음 인정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사생활 보호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불리한 정보만 삭제해 달라고 요청할 사람도 있어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판결 전후를 살펴보겠습니다.

사건의 발단

스페인 사람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가 구글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해 보니 1998년 스페인 신문에 난 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채무 때문에 자기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곤잘레스는 해당 신문사와 구글에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오래 전 얘기이고 다 해결한 문제인데, 인터넷 검색에 등장하다니 "말도 안돼"라고 말했습니다. 신문사에 공고를 삭제하거나 수정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구글에도 검색 데이터가 나오지 않게 삭제해주거나 신문사 링크 연결을 끊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곤잘레스는 스페인 정보보호 당국에도 신고했습니다. 당국은 심사 결과 적법한 공고문이니 신문사는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구글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지만, 구글은 합법적으로 취득한 검색 결과인데 검열할 수 없다며 삭제를 거부했습니다. 곤잘레스는 스페인 법원에 구글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스페인 법원은 고민하다 유럽 내 최고 재판소인 유럽사법재판소에 유권해석을 요청했습니다.

판결의 논리: 구글은 정보 유통의 책임자

구글 등 검색엔진 사업자(운영자)는 제 3자가 만든 웹 페이지에 등장하는 개인 정보를 끌어오는 과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유럽사법재판소의 시각입니다. 검색엔진이 개인 이름으로 검색한 결과나 다른 웹 사이트에 등재된 개인 정보를 보여줄 때는 그에 따른 의무도 있다는 거죠. 판결문에서는 검색업체는 '관리자'로 지칭했습니다. 검색업체가 직접 생산한 정보는 아닐지라도 정보 유통 과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검색은 검색엔진 회사의 '지시'에 의해 자동적이고 시스템적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개인이 본인의 검색 결과가 '부적절하거나 연관성이 떨어지거나 더 이상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검색엔진 업체에 삭제를 요구할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업체는 개인의 항의를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판결의 영향력: 원칙 확립…유럽은 직접 영향권

판결은 스페인 법원에 계류중인 2백 여건의 유사 소송에 바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상급기관의 유권해석이 나왔으니 스페인 법원은 이를 기준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유럽연합 내 28개 나라, 5억 주민에게도 적용됩니다. 사건의 당사자인 구글 뿐 아니라 야후, 마이크로소프트의 빙 등 다른 검색엔진도 영향을 받습니다. 유럽 각국은 유럽사법재판소가 결론 내린 '검색업체의 책임성과 부적절한 데이터에 대한 삭제 요구권'이라는 원칙을 적용해 갈 것으로 보입니다.

고민에 빠진 검색엔진: 구체적인 실행은 개별 국가 몫

구글은 이번 판결에 대해 실망했다고 밝혔습니다. 판결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법률 전문가들도 검색엔진들이 앞으로 개인 정보 가운데 어떤 것은 보여주고 어떤 것은 감출지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 외 다른 지역은 판결의 영향권에 있지 않습니다. 구글의 검색 결과가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유럽사법재판소가 마련한 기준은 유럽 안이나 유럽 밖에서나 개별 국가별로 구체적인 기준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지금도 나치를 홍보하는 웹사이트는 검색에서 제외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생활 보호를 향한 일보전진

레딩 EU 법무담당 집행위원은 판결 이후 페이스북에 "개인 정보 보호에 대한 명백한 승리"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판결은 '디지털 석기 시대'에서 '현대화된 전산 세계'로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확인해줬다고 말했습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12년 자신에 대한 인터넷 개인정보를 삭제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잊힐 권리' 법안을 제안했습니다. 검색업체들은 합법적인 근거가 없다면 사용자의 요구에 응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이번 판결과 법안 취지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1995년 유럽 의회가 마련한 '개인 정보 보호와 관련 정보의 자유로운 취득에 관한 지침'에 근거했습니다. 유럽연합 집행위는 "이번 판결이 집행위를 위해서나 유럽인들을 위해서나 좋은 일이다"라고 환영했습니다.

'잊힐 권리'의 모호성…권리 악용의 소지

판결에 따라 사용자가 '잊힐 권리'를 주장하면 검색업체들은 고민에 빠집니다. 어떤 기준에 따라 무엇을 삭제해야 할지 구체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판결문에는 개인 정보 보호라는 측면과 정보의 근본적인 속성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고 적시했습니다. 개인정보라는 것이 한편에선 사생활이라는 민감한 주제이지만 또 한편에선 공공의 이해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검열 반대 기구들은 이번 판결이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을 침해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인터넷의 속성인 자유로운 정보 유통도 가로막을 수 있다고 반대했습니다. 권리를 악용할 소지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이 법률적 실수가 없었던 것처럼 꾸미려고 검색엔진 업체에 삭제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과거 추문을 덮기 위해 관련 데이터를 삭제해 달라고 요구하면 검색업체들은 이를 삭제해야 할까요? 곤잘레스를 다시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16년 전 한때 채무자였던 어두운 과거를 인터넷에서 지우고 싶어했습니다. 불명예이고 오래된 기록이며 이미 해결한 사안이니 현재의 곤잘레스를 설명하는 자료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이 맞습니다. 그의 요구대로 검색결과에 등장하지 않도록 삭제하는 것은 사생활 보호 원칙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그가 정치인이거나 정치인이 된다고 가정해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정치인으로서 과거 성실 납세자였는지 행적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채무자였던 기록이 인터넷 검색 결과로 나와야 유권자들이 판단할 수 있고, 이게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서경채 기자 seokc@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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