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동진 vs 러 관세동맹 '빅뱅'.. 무기는 경제 제재와 가스 밸브

이훈성기자 2014. 3. 2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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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기] <중> 동서 게임의 시작

러 천연가스 통과하는 우크라 동서 완충지대서 격전장으로푸틴 사금고 겨냥 3차 제재에도 에너지 수입 등 이해관계 얽혀EU 회원국들 눈치 보기만'다른 세계에 살고있는 사람' 푸틴의 강공 드라이브가 변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까지 차지하려고 들까.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자치공화국처럼 러시아 합병을 원한 주변국까지 챙기려 할까. 미국과 서유럽 대 러시아의 갈등이 어디까지 치달을지 속단하기 어렵다. 양자는 경제제재와 에너지 공급 중단이라는 강력한 '한 수'를 각자의 손에 쥐고 있다. 군사력 우위를 다투며 세계를 제패하려는 경쟁(냉전)으로까지 보기는 힘들어도 동서가 냉전 종식 이후 사실상 처음'파워'를 다투는 상황이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새로운 동서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유럽 동진 가로막고 선 푸틴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주장하는 반정부시위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사태는 주지하듯 유럽연합(EU)의 동부파트너십 정책과 러시아의 관세동맹 확장정책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EU는 2009년부터 조지아,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권 6개 국가와 'EUㆍ동부파트너십'이라는 정치·경제협의체를 만들고 이들 국가에 준가입국 지위를 부여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EU 확대 정책의 일환인 셈이다. 이에 맞서 2010년 벨로루시, 카자흐스탄과 관세동맹을 맺은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크라이나까지 끌어들여 2015년 유라시아경제연합(EEU)를 출범하려고 작업해왔다.

EU와 러시아의 유치전은 우크라이나에서 특히 치열했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이 옛 소련 위성국에서 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친서방화된 뒤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으로 유럽과 러시아의 완충지대로 자리매김했다. 무엇보다 이 나라에는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운반하는 가스관의 80%가 묻혀있다.

소련 해체 이후 EU의 동진(東進)정책으로 역내 영향력을 크게 상실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자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 가스 공급을 중단하는 강수를 구사하며 서방 편입을 막았다. 우크라이나의 경제난을 틈타 EU가 동부파트너십을 앞세워 협력협정을 체결하려 하자 150억달러 원조를 약속하며 우크라이나 정권을 돌려세웠다. 이런 각축전은 결국 우크라이나 내부의 인종·지역 갈등에 불을 질렀다.

공멸 의식하며 벌이는 제재 공방

러시아의 크림반도 무력점거로 시작된 서방의 대러시아 경제제재는 크림 합병으로 수위가 급상승하고 있다. 20일 미국과 EU가 일제히 발표한 3차 제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돈줄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본격 제재의 서막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러시아 고위관료들의 사금고"로 지목한 뱅크로시야, 러시아 최대 민영 가스회사 노바테크의 대주주 겐나디 팀첸코, 블라디미르 야쿠닌 러시아철도공사 사장, 대형 도로건설업체 모스토트레스트의 주주 아르카디 로텐버그 등이 블랙리스트에 포함됐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 미국 고위인사 9명을 상대로 즉각 보복 제재에 나선 러시아는 24일엔 스티븐 하퍼 총리 등 캐나다 인사 13명에 입국금지 제재를 가했다.

서구의 앞선 두 차례 제재를 비웃던 러시아 정재계는 3차 제재 이튿날 노바테크와 모스토트레스트의 주가가 각각 13%, 5.7% 폭락하고 국채 수익률이 9.6%까지 치솟자 표정이 굳어졌다. 푸틴의 비밀금고로 알려진 스위스 에너지트레이딩회사 군보르의 창업자이기도 한 팀첸코는 제재 전날 지분 43%를 스웨덴인 동업자에게 처분했다. 푸틴의 관재인이 푸틴의 지분을 황급히 명의신탁했다는 말이 파다했다. 러시아 경제발전부는 올해 1분기 순자본유출액이 약 700억달러(75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24일 예상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전후한 세 달 동안 지난해 전체(627억달러)를 넘어서는 자본 유출이 발생하고 있다. 주가는 30% 가까이, 루블화는 10% 이상 가치가 하락했다. 2.5% 수준으로 예상했던 올해 경제성장률은 '0'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국제신용평가사들이 앞다퉈 러시아 신용등급 전망을 내리고 있다. 안톤 실라노프 재무장관은 "서방의 제재 부과는 전반적 측면에서 보자면 러시아 경제에 분명히 부정적"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서방의 제재가 일사불란한 건 아니다. "러시아 산업의 핵심부문을 제재할 수 있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며 내처 러시아 재정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에너지산업을 타격할 뜻을 비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는 달리 유럽 정상들은 개인을 넘어서는 제재 확대를 머뭇대고 있다.

특히 에너지 교역에 있어 EU는 가스 수입의 45%, 원유 수입의 33%, 석탄 수입의 26%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는 또한 유럽 은행들의 신흥국 대출의 5.5%를 차지하는 주고객이자 2,743억달러(295조원)의 EU 채권을 외환보유액으로 운용하?물주다. 러시아 자금 유입으로 이익을 얻고 있는 영국, 러시아에 군함 등 무기를 팔고 있는 프랑스 등 개별국가의 이해관계도 첨예하다.

물론 EU가 러시아를 상대로 교역중단, 자금동결 등 전면제재를 단행할 경우 단기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 쪽은 러시아다. 러시아에게 EU는 총수출의 55%를 차지하는 제1교역국이다. 러시아에 투자되는 외국자본 중 80% 가량이 EU 자본이다. 더딘 산업구조조정으로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러시아에게 EU로 가는 가스관 차단은 천연가스 수출의 70%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럽 역시 러시아산 에너지를 대체할 방도가 궁한 상황이라 러시아를 무턱대고 자극할 수 없는 처지다. 24일 리아노보스티 통신은 미 백악관 고위인사의 말을 빌어 미국이 크림 사태로 러시아와 군사 대결을 벌일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푸틴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경제ㆍ외교적으로 깊숙이 엮인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갈등이 냉전과 같은 전면적 갈등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란 낙관론의 근거가 된다. 러시아는 2008년 남오세티야·압하지야 사태 때처럼 친러 자치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되 병합하지 않는 전례를 따르리라는 예측을 뒤엎고 크림자치공화국을 병합하는 공격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는 자국의 유리한 상황을 염두에 둔 '합리적 선택'으로 볼 만한 여지가 있다. 유럽은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고 미국은 이란핵ㆍ시리아 사태의 외교적 해결을 위해 러시아와 공조가 아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사태 수습을 예견하기 어렵게 하는 강력한 변수가 있다. 바로 푸틴이다. 집권 1, 2기 때만 해도 실용주의적 지도자로 여겨졌던 그는 2012년 집권 3기를 시작한 이후 서방과 잦은 마찰을 빚는 동시에 역내에서 노골적인 개입주의 정책을 펴고 있다. 친서방 노선을 추종했던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에게서 권력을 물려받은 뒤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통치로 회귀한 그는 국내에서 절대권력에 다름 아니다. '강력한 러시아'를 표방하는 그의 선택을 견제할 만한 권력기구나 반대세력이 없는 것이다.

푸틴의 대외정책이 그리 별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안드레이 치간코프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는 러시아 외교정책의 전통을 서구주의, 국가주의, 문명주의로 구별하면서 푸틴을 국가주의를 추종하는 지도자의 전형으로 꼽는다. 대외적으로는 경제적·군사적 능력을 통해 서구의 인정을 얻는데 초점을 두고 대내적으론 정치사회적 질서 회복을 강조하는 전통을 따른다는 것이다. 옐친처럼 서방과의 협력을 통해 러시아의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서구주의와는 다르지만 러시아의 고유가치를 전파하며 영토 팽창을 추구하는 문명주의와도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푸틴의 야심이 크림 너머까지 뻗쳐있다는 비관적 전망이 무성하다.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려는 가망 없는 분석도 시도된다. 뉴욕타임스는 푸틴이 오바마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고 분석한다. 대통령 3연임 금지 규정을 피하려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현 총리)에게 직위를 물려주고 자신이 총리를 맡던 시절 메드베데프를 우대하며 실권자인 자신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것이다.

푸틴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서방 지도자로 꼽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사석에서 오바마에게 "푸틴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메르켈은 동독 출신으로 러시아아도 능하며 실제로 푸틴과도 사이가 원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틴은 망상가는 아니지만 자신이 창조한 과거 러시아의 영화 속에 살고 있다"는 러시아 주재 미 정보당국자 출신 피오나 힐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의 진단도 웃어 넘길 수 없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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