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은 200배 더 일하는 거야?

허은선 기자 2013. 12. 1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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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자의 월급이 직장 내 최소 월급의 12배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스위스의 '1:12 법안'이 부결되었다. 국민투표 전 CEO의 고액 연봉을 두고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내년에는 기본 소득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을 전

열기구에 탄 남자가 공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는 땅 위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제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땅 위의 여자가 말했다. “당신은 지상 10m 높이의 열기구에 있어요. 당신의 현재 위치는 북위 40~41도, 서경 59~60도입니다.” “엔지니어인가 보죠? 정확할진 몰라도 도움은 하나도 안 되는 정보네요.”

여자는 “그쪽은 경영 일을 하죠?”라고 되물었다. 남자는 “맞아요. 어떻게 알았죠?”라며 놀랐다. “당신은 자신의 현재 위치도,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니까요.” 이것이 여자의 대답이었다.

지난 11월25일 스위스 1:12 법안 지지자들의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1zu12initiative)에서 가장 인기를 끈 일화다. 바로 전날인 11월24일 스위스에서는 최고 월급이 최소 월급의 12배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1:12 법안’의 통과가 좌절됐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최고경영자의 ‘월급’이 같은 기업 내 최저임금 노동자의 ‘연봉’을 넘지 못할 전망이었다.

ⓒAFP Photo 11월2일 스위스 사민당 청년조직 JUSO 회원이 ‘1:12 법안’ 찬성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스위스 사민당의 청년조직 ‘스위스 청년사회민주주의자들(JUSO·JungsozialistInnen Schweiz)’이 주도한 1:12 법안은 2011년 3월, 시민 11만3005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한 스위스는 국민투표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나라다. 스위스에선 1년6개월간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누구나 법안을 발의해 연방정부 및 연방의회 검토를 거쳐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알프스 처녀 하이디의 취미는 ‘국민투표’ 참조).

결과는 실패였다. 2011년의 스위스 총선보다 높은 53.6%의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국민투표에서는 반대표가 65.3%로 더 많았다. 심지어 26개 캔턴(자치주) 중 찬성 여론이 더 높은 캔턴이 한 곳도 없었다.

JUSO는 스위스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잘사는 나라이지만 소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며 1:12 법안을 발의했다. 스위스의 2012년 1인당 국민소득은 7만8881달러(약 8367만원)로 한국의 3배가 넘는다. 사실 스위스는 OECD 기준으로 봤을 때 소득 불균형이 심한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2000년대 후반 OECD 지니계수 평균은 0.31로 스위스의 지니계수 0.28보다 높다. 지니계수는 소득이 얼마나 균등하게 분배되는가를 나타내는 수치로 0은 완전평등, 1은 완전불평등한 상태를 의미한다.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뜻이다.

‘일자리를 없애고 싶으냐?’ 1:12 법안 반대 포스터.
하지만 스위스 국민의 체감은 달랐다. 스위스 국민이 느끼는 소득 불평등 정도는 각종 통계가 가리키는 수치보다 심각했다. 1:12 법안 국민투표가 있던 11월24일 영국 〈BBC〉는 “스위스에선 일부 경영자가 피고용인보다 200배를 더 번다는 사실에 사회적 분노가 일었다”라고 보도했다. 앞서 10월17일 미국 〈CNBC〉는 시장조사업체 IHS의 페페 이거 연구원의 말을 인용해 “스위스 최저소득층의 소득은 다른 계층보다 많이 늘었지만 중산층의 소득은 제자리걸음 수준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잘사는 사람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정작 중산층의 살림살이는 제자리걸음이니 대중의 불만이 커졌던 것이다. 실제로 유럽 CEO 급여 순위 10위 중 절반은 스위스 CEO다.

그간 스위스는 낮은 법인세 등으로 경영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친기업 국가로 손꼽혀왔다. 영토와 자원이 부족한 나라이기에 과거에는 글로벌 기업과 고액 연봉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관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식품업체 네슬레, 제약사 로슈홀딩스 등 스위스에 본거지를 둔 글로벌 기업은 스위스에 세금을 충실히 납부한다는 이유로 환영받았다. 실제로 스위스 정부가 걷는 한 해 세금의 절반 이상을 글로벌 기업이 납부한다.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266배, 네슬레는 215배…

하지만 스위스 국민들은 소득 편중이 점차 심해진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좌파 성향의 정치 연구소 ‘덴크네츠(Denknetz)’에 따르면 1980년대 최고 연봉은 최저 연봉의 6배 수준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말에는 13배까지 격차가 벌어졌고, 2007년에는 93배까지 벌어졌다. 글로벌 기업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노바티스는 266배, 초콜릿 회사 린트는 230배, 네슬레는 215배 차이가 났다. 또한 스위스 소득 상위 300명이 보유한 재산은 5640억 스위스 프랑(약 659조원)에 달하는데, 이는 그리스 정부의 부채를 한 번에 갚을 수 있는 규모다.

앞서 지난 3월 CEO 고액연봉 제한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진 배경에는 이러한 여론이 작용하고 있었다. 마침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의 다니엘 바젤라 회장이 7700만 스위스 프랑(약 840억원)을 퇴직금으로 받는다는 소식에 국민의 분노가 들끓던 참이었다. 대중적 분노가 기업 임원의 보수를 경영진 대신 주주가 결정하게 한다는 법안을 67.9%의 찬성률로 통과시켰다. 경영진이 마음대로 자신들 연봉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스위스 국민 10명 중 약 7명이 공감했다는 뜻이다.

이 법안은 중견 기업가이자 무소속 정치인인 토마스 민더의 이름을 따 ‘민더 법안’이라고도 불린다. 발의자 민더는 원래 화장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의 대표였다. 그런데 2001년, 스위스 항공에 화장품과 치약을 납품하던 민더의 회사가 도산 위기에 처한다. 스위스 항공이 경영난을 이유로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스위스 항공은 당시 CEO에게 약 150억원이 넘는 보수를 지급했다. 당시 민더가 계약해지로 못 받은 대금은 약 6억원이었다. 민더는 사리사욕만 채우는 대기업 경영자의 행태를 바로잡겠다며 법안을 발의했다. 결국 민더의 노력은 약 10년 만에 결실을 봤다. 민더 법안의 통과를 막기 위한 스위스 정부와 기업의 방해가 그야말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민더 법안의 통과로 자신감을 얻은 스위스 사민당은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1:12 법안의 국민투표 통과를 자신했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법안에 우호적인 답변이 더 많았다. 하지만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찬반양론이 점점 비슷해지더니 결국 투표 직전에는 반대 의견이 더 우세해졌다. 노년층일수록, 비교적 보수적인 독일어권 지역 주민일수록 1:12 법안에 반대하는 비율이 높았다(스위스에서 독일어권은 비교적 보수적, 프랑어권은 진보적이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민더 법안에 찬성했던 스위스 여론이 왜 반대로 돌아섰을까? 이를 두고 스위스 안팎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우선, 언뜻 3월 투표 결과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보수의 구체적 수준은 주주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라는 기본 원칙에는 스위스 국민의 뜻이 일치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1:12 법안이 1:40으로 패배했다”

한편으로는 정부와 기업의 법안 통과 저지 노력이 먹혀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스위스 국민투표가 종료된 직후 “1:12 법안이 1:40으로 패배했다”라는 찬성 진영의 주장을 인용했다. 스위스 정부와 친기업 진영이 1:12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들인 홍보비용이 법안 지지 진영이 쓴 비용의 40배에 달했다는 의미다. 반대 진영에서는 ‘1:12 법안이 통과되면 스위스 경제가 무너져 내린다’는 내용의 광고를 반복해서 내보내는 데 20만 스위스 프랑(약 2억3561만원)을 썼다.

투표가 끝나고 요한 슈나이더 아만 스위스 경제장관은 “기업 유치와 일자리 공고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며 기쁨을 표시했다. 네슬레의 로빈 티클 대변인도 “스위스 국민들이 경쟁 체제와 열린 사회를 원한다는 사실을 이번 투표 결과가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득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스위스 국민의 노력은 내년에도 이어진다. 성인에게 기본 소득을 보장하라는 국민 발의 법안이 의회에 제출된 상태다. 고용 상황과 관계없이 정부가 매달 국민에게 2500스위스 프랑(약 294만원)을 지급하라는 게 요지다. 법정 최저임금을 월 4000스위스 프랑(약 480만원)으로 보장하라는 안건도 2014년 초 투표에 부쳐질 예정이다.

허은선 기자 alle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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