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식민 지배 사과, 영국과 일본의 태도

양만희 기자 입력 2013. 2. 25. 09:21 수정 2013. 2. 2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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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영화 <간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간디'라고 하면, '비폭력'과 '물레질'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했던 터라, 청년 시절부터 시작하는 간디의 일대기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주친 한 장면에 그만, 심장이 멎는 듯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암리차르 대학살 사건.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여가 지난 1919년 4월 13일 일요일 오후. 인도 북부 펀자브 지방의 암리차르에서 평화롭게 집회를 하고 있던 비무장 인도인 수천 명을 향해 영국군 장군이 '발포'를 명합니다. 설마, 설마 하던 인도인들을 향해 총탄이 쏟아졌고 무고한 목숨들이 힘없이 스러져 갔습니다. 빠져나갈 출구마저 모두 막았기 때문에 광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 출동한 군대가 갖고 있던 총탄 1,650발이 10여분 만에 모두 소진된 뒤에야 광란의 총질은 중지됐습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영국 정부는 379명이 숨지고 1,200여 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사망자 가운데는 어린이 41명이 포함됐고 태어난 지 6주밖에 안 된 영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도 측은 "사망자만 1천 명 가까이 된다"며 수긍하지 못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발포 명령을 한 영국군 준장 Dyer의 주장, "도덕적 교훈(moral lesson)을 가르쳐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인도에서는 '더 이상 영국에 기대할 게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독립을 위한 '불복종 운동'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암리차르 학살 사건을 "영국 제국주의의 기반을 흔든 사건"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영화 <간디> 중에 암리차르 사건 부분만 따로 편집해 설명 자막까지 입힌 유튜브 동영상이 있더군요.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jOkGSTzxyY

그런 천인공노할 대학살의 현장에 가해자인 영국의 총리가 이번에 참배했습니다. 캐머런 총리는 참배를 마치고 "영국 역사에서 대단히 수치스러운 사건(deeply shameful event)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학살 사건 이듬해 윈스턴 처칠(당시 전쟁장관)이 했던 말, "잔악무도한 사건(monstrous event)"이라는 비판을 인용했습니다. 암리차르 학살 사건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언급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1997년 암리차르를 방문해 "고통스러운 사건(distressing episode)"이라고 유감을 표명했고, 블레어 전 총리도 총리가 되기 전에 학살 현장을 찾아 "식민주의의 가장 어두운 면을 떠오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요.

그런데 영국 정부를 대표하는 현직 총리가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사건 발생 94년 만입니다. 늦은 것도 늦은 것인데다, 캐머런 총리는 대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apology)하지 않았습니다. 캐머런의 발언은 유감(regret) 표명에 머물렀습니다. 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캐머런 총리의 사과를 원한다. 그가 사과한다면 우리가 받은 상처는 어느 정도 치유될 것"이라고 했지만 캐머런 총리는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캐머런의 학살 현장 참배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역사적 계기가 있을 때마다 과거의 잘못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사과하는 독일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죠.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달 세계 홀로코스트 기념일에도 "독일인은 나치의 각종 범죄, 2차 대전 희생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영원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캐머런의 행보가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은 인도 방문에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영국에는 인도계 유권자가 1백 50만 명 가량 되는데, 2015년 총선을 앞두고 이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꿍꿍이가 있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또 이번 인도 방문에 기업인 1백 명을 대동했는데, "최대 규모의 기업인 대표단을 이끌고 왔습니다. 영국은 인도의 동반자가 되길 원합니다. 영국 기업인 대표단이 인도 기업인과 만나 협력 관계를 강화하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경제적 실리 챙기기도 방문의 중요한 목표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6위, 인도는 세계 10위입니다. 그 옛날의 식민지가 아닐뿐더러, 경제 강국으로 커가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으니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펀자브 지방 시크교도들의 성지인 '황금사원'을 찾아, 예법대로 맨발에 머리에 두건을 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원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도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죠. 캐머런 총리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영국과 인도가 역사적으로 문화를 공유한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양국 사이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함께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이 만들어낸 '문화의 공유'를 이렇게 표현하는 걸, 인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인도처럼 식민 피지배의 아픈 경험을 가진 우리로서는 가해국 현직 총리의 이런 행보는, 냉정하게 살펴봤을 때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과거의 잘못을 직접 찾아 확인하면서 미래를 논의하자는 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의 잘못을 확인하기는커녕, 그런 악행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역사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 하는 일본의 행태에 비춰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최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만난 아베 총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시아가 부흥하는 지금, 일본은 우리가 공유하는 규칙과 가치를 진흥시키고 역내 고도 성장국들과 나란히 성장해 가는 데서 더 많은 책임을 질 것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대놓고 거스르면서 '가치'를 운운하니, 참으로 허망하게 들립니다.

암리차르 학살 사건을 보면서, 이 사건 바로 이틀 뒤인 1919년 4월 15일 한반도에서 있었던 '제암리 학살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만세 운동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문을 잠근 뒤 총을 쏴 학살한 제암리 사건 말입니다. 일본의 역대 정권이 보여준 과거사 반성이 그다지 흔쾌하지 않았지만, 아베 정권은 거기에서 더욱 후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라도 일본의 현직 총리가 제암리 학살 현장을 찾아 참배하고 반성하는 걸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과거를 철저하게 확인하면서 미래를 논해야 합니다. '과거는 이제 그만, 이제 미래를 바라보자'는 태도로는 일본은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양만희 기자 manba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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