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톨레랑스, 동성결혼 앞에 '흔들'

파리·최현아 편집위원 2012. 12. 20.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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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중심가인 마레 지구에 가면 유독 동성 커플이 눈에 많이 띈다. 행인들 역시 특별한 눈길을 주지 않고 무관심하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자유롭고 타인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사고 깊숙이 자리 잡은 금기가 있다. 그 금기를 올랑드 정부가 손대기 시작했다.

올랑드 정부는 대선 기간 선거 공약으로 동성 결혼 및 입양 합법화를 위한 법 제정을 내걸었다. 이 공약은 대선 직후 열린 의회 선거에서도 다시 한 번 공약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지난 11월7일 정부는 이 법안을 각의에 제출했고 2013년 1월 의회에서 검토할 예정이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내년 상반기에는 동성 결혼 및 입양이 합법화될 예정이다.

사회당을 비롯한 좌파 진영을 중심으로 동성 결혼 합법화 움직임은 있어왔다. 유럽환경당 소속인 노엘 마메르 의원은 2004년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시민법에 결혼할 커플들의 성별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며 남성 커플의 결혼 서약을 허용했다. 이 결혼식은 보르도의 지방법원에서 취소 결정을 받으면서 당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2007년 대선 때 사회당 후보였던 세골렌 루아얄은 동성 결혼을 허용하겠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AP Photo 올랑드 정부의 동성 결혼 합법화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11월18일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장 먼저 동성애 허용한 프랑스의 역설

반면 우파 진영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우파를 대표하는 정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공식 의견은 동성 결혼 반대다. UMP의 당 대표인 장 프랑수아 코페는 자신이 시장으로 있는 지역에서 동성 결혼식 주례를 요청할 경우 거절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극우파인 국민전선 등에서도 동성 결혼이나 입양을 반대하고 있다.

정부가 동성 결혼과 입양 합법화를 추진하자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11월17~18일 이틀 동안 열렸다. 11월17일 시위는 가톨릭가족협회(AFC)가 주관했는데 파리에서 20만명(경찰 추정 7만명), 리용에서 3만여 명 등 전국 도시 곳곳에서 반대자들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가 뿌리는 유인물에는 정부의 '모든 이를 위한 결혼'이라는 법안 제정을 반대한다며 이는 도덕적이고 국가적인 가치의 위기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시위에 참여한 70대 제라르 씨는 정부의 법 제정을 두고 "프랑스 사회의 문명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가족의 존립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반면 11월18일에 열린 시위는 양상이 좀 달랐다. 이 시위는 가톨릭 근본주의 단체(Civitas)에서 준비했는데 시위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단체들과 이를 촬영하던 기자들이 시위대 부근에서 평화적인 퍼포먼스를 열자, 일부 시위 참가자가 이들에 대한 언어폭력과 물리적인 힘을 행사했다.

"프랑스에선 오바마가 대통령 못 돼"

프랑스는 보수성이 강한 나라다. 그런데 그 보수성에 양면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프랑스 국민이 미국 오마바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흑인 대통령이 당선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동성 결혼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현재까지도 동성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프랑스는 1791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동성애를 무죄로 간주했던 나라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회 저변에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 및 차별이 존재했는데, 1981년 미테랑 대통령 시절에야 동성애에 대한 증오를 법으로 금지했고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 조항을 삭제했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동성애자들은 그들만의 카페, 바 등에 공개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Reuter=Newsis 11월15일 동성 결혼 법안 지지 시위에서 한 동성 커플이 입을 맞추고 있다.

1999년 프랑스는 비혼인 제도인 팍스(PACS ·시민연대협약)에 관한 법을 통해서도 동성 커플을 인정했다. 팍스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동거를 합법화한 제도로 시청에서 혼인 서약을 맺는 결혼식과 달리 지방법원이나 대사관에서 동거를 공인받을 수 있다. 하지만 팍스는 커플이라는 관계는 인정하지만 법적으로 가족관계가 인정되지는 않는다.

한편 가톨릭 전통이 더 강한 남부 유럽 국가들, 즉 스페인·포르투갈에서는 이미 동성 결혼을 허용하고 있고 북유럽 국가 가운데 네덜란드·벨기에에서도 이를 합법화하고 있다.

그런데 법안 제정과 상관없이 현재 프랑스에는 동성 커플과 아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가족 형태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인구통계연구소(INED)에 따르면 4만여 어린이가 동성 부모와 함께 산다고 하고, 게이 및 레즈비언 부모연합회(APGL)에 따르면 그 수가 3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동성 커플이 자녀를 둔 가족 형태는 200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성 커플들이 자녀를 보육하는 사례는 커플 중 한 명이 예전에 가진 아이를 같이 돌보거나 입양하는 경우가 많다. 드물지만 레즈비언 커플과 게이 커플끼리 합의 아래 의도적으로 아이를 가져 공동으로 부양하는 예도 있다. 프랑스 텔레비전에서는 동성 커플들이 아이를 기르는 예를 다큐멘터리로 소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동성 커플 사이에서 자란 아이들이 두 엄마나 두 아빠와 함께 살아가는 상황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 없이 적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학교나 사회에 나갔을 때는 특별한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동성 커플 결혼 합법화 문제는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가톨릭의 영향력이다. 프랑스에서 결혼식은 행정적인 절차이면서 종교적인 의미가 크다. 일반적으로 많은 커플이 시청에서의 결혼식과 성당 결혼식을 동시에 치르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가톨릭의 시각에서 동성 결혼은 결혼의 본질적 의미를 살릴 수 없다. 결혼을 통해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 결혼 허용 문제는 또 평등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성 결혼을 찬성하는 이들은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 역시 가족을 구성할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11월20일 프랑스시장협회(AMF)의 제65차 회의에서 올랑드 대통령이 동성 결혼 합법화와 관련해 일관성 없는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동성 결혼 허용에 적대감을 가진 시장들을 고려해 그가 '인식의 자유'라고 말한 것이다. 이 발언은 동성애자들의 반발을 부추겼고, 우파 진영에서는 대통령이 뒷걸음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때문에 올랑드를 지지했던 동성애 관련 인권단체들이 올랑드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의 오락가락 행보 탓에 프랑스 결혼 정책도 오락가락하고 있다.

파리·최현아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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