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國記] 블로거 연쇄 피살..'자유의 펜' 꺾이나?

이재강 입력 2015. 8. 19. 13:17 수정 2015. 8. 1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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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국에서 살해당한 아비지트 로이와 아내

■ 고국 찾은 저명 블로거 잔인하게 피살

방글라데시 태생의 미국 국적자 아비지트 로이(43)와 아내는 릭샤(자전거 수레)에 몸을 싣고 있었다. 책 박람회에 참석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릭샤가 다카 대학교 내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때 괴한 두 명이 나타나 부부를 끌어내렸다. 이어 로이의 머리와 목을 겨냥해 마체테(사탕수수 등 농작물을 쳐낼 때 쓰는 긴 칼)를 휘둘렀다. 치명상을 입은 로이는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어깨와 손을 다친 아내는 울부짖었다. 로이는 즉사했다. 올해 2월 26일 저녁 8시 30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비지트 로이가 살해당한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의 옹호자였다. 로이는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나 싱가포르 국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이주한 전문 엔지니어였다. 그러나 로이가 본업보다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고국 방글라데시의 표현의 자유 문제였다. 그는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종교적 극단주의를 혐오했다.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에 비판적이었다. 로이가 개설한 블로그 Mukto-Mona(자유로운 생각)는 방글라데시 합리주의자와 무신론자, 인권운동가의 성지였다. 그래서 로이는 고국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표적이 됐다.

■ 3월, 5월, 8월 잇따라 블로거 살해돼

로이는 올들어 일어난 블로거 연쇄 살인의 시작이었다. 3월에는 와시쿠르 라만이, 5월에는 아난타 다스가, 그리고 이달 14일에는 닐로이 차크라바르티가 살해당했다.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에 비판적인 블로거들이었다. 네 번째 살해 후에는 블로거 6명에게 살해 위협이 가해졌다. 이미 84명의 살해 명부도 나돌고 있었다. 살해 방법도 거의 동일했다. 괴한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마체테로 표적을 난자했다. 아무 데나 찌르지 않고 머리와 목을 노렸다.

■ 훈련받은 조직원 소행에 무게

도대체 누가 이런 대담한 살인 행각을 벌이고 있을까. 범행 수법이 대담, 정교한데다 표적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해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한다는 점에서, 훈련 받은 조직원의 소행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표적의 소재와 동선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3월에 살해된 와시쿠르 라만의 경우, 본명을 감추고 늘 가명으로 글을 썼고 얼굴 사진을 어디에도 게시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범인들은 그를 정확히 특정해 살해했다. 블로거 연쇄 살인에는 극단주의 이슬람 조직 2개가 자신의 소행을 자처하고 나섰다. ABT와 AAI라는 단체인데, 둘 다 토종 조직이고 AAI는 알카에다의 하부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 폭력 중지와 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행진

■ 경찰, 범인 잡을 의지 있나?

무자비한 폭력에 시민이 잇따라 쓰러지는데, 방글라데시 경찰은 무얼 하고 있을까. 경찰은 일단 지난 3월 라만 피살 직후 용의자 2명을 체포했다. 그런데 이후에도 5월, 8월에 또 비슷한 범행이 일어났다. 방글라데시 정부에 대한 비난이 국내외에서 일어났다. 미국과 유엔이 방글라데시 정부의 적극적 대응을 촉구했고 국제 인권단체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경찰은 네 번째 사건의 용의자 두 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두 명 다 ABT 소속 조직원임을 자백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그런데 사건 전개 과정에서 경찰의 한심한 대응을 보여주는 일들이 잇따라 드러나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다. 피살자들이 살해 위협을 느끼고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지만 "해외로 나가 있어라."는 등의 무성의한 태도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또한 샤히둘 호큐 경찰청장은 블로거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듯한 발언을 해 원성을 샀다. 그는 "국민들의 종교적 감정에 반하는 글을 쓸 경우 14년 형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인권 단체 Human Rights Watch는 "경찰청장이 블로거를 보호하기는 커녕 범인 편을 든다."고 비난했다.

■ 폭력 앞에 ‘자유의 펜’ 꺾이나?

방글라데시는 1억6천만 인구의 90% 가량이 이슬람교도지만 이슬람 종교 국가는 아니다. 국호가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인 세속 국가이다. 하지만 온건한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이곳에도 10여년 전부터 극단주의가 뿌리내려 점점 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그래서 블로거 연쇄 살인 사건은 세계 이슬람권 극단주의화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자유주의 블로거 아난야 아자드(25)는 지난 5월 세번째 블로거가 살해당한 직후 페이스북 메신저로 협박을 받았다. "다음은 당신 차례다. 몸조심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아자드는 칼럼니스트 일을 그만뒀다. 집안에만 머무르고 블로그 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다. 신변의 위협 때문에 펜을 꺾는 제2, 제3의 아자드가 늘어나고 있다. 폭력 앞에 표현의 자유가 움츠러들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자유의 펜'은 꺾이고 마는가?

이재강기자 (run2000@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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