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유럽은 왜 코미디언 출신 괴짜 정치인에 환호하나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영국인의 재발견’ 저자 2014. 5. 3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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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코미디가 되니 코미디언이 정치인이 되는가 보다. 아니면 워낙 세상 살기가 고달파 사람들이 코미디언들을 정치인으로 뽑아 그들의 입담으로 시름을 잊으려 하든가. 유럽의 인기 절정 정치인 중에는 코미디언 출신이 둘 있다. 그중 하나가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의 존 크나르(Jon Gnarr)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제1야당 '오성운동(Movimento 5 Stelle)'의 베페 그릴로 대표이다.

이 두 사람은 정계에 뛰어들 때 모두 인기절정의 정치풍자 코미디언, 블로거, 영화배우였다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많다. 선거운동이나 소통을 할 때 주로 웹사이트,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SNS를 이용해 직접 유권자들에게 접근해 설득한다는 점, 그리고 당 운영, 정강정책, 정치운영 방식이 기존 정당이나 정치인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 둘은 정말 장난처럼, 코미디같이 가볍게 정치를 시작했지만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어 기성정치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있다.

존 크나르(47) 시장부터 살펴보자. '최고당(The Best Party)'의 대표이자 현직 시장인 크나르는 2010년 레이캬비크 시의원 선거 때 유효표의 34.7%를 획득, 시의회 의원 15명 중 6명을 최고당 후보들로 채웠다. 이번 5월 말에 4년의 임기를 끝내고 은퇴하는 크나르는 2009년 11월 갑자기 레이캬비크시장을 목표로 당을 만들어 6개월 만에 치러진 시의원 투표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레이캬비크시 인구 12만명은 아이슬란드 인구 32만5000명의 3분의 1이 넘는다. 그만큼 레이캬비크 시장은 아이슬란드 정치에서 수상 못지않게 영향력이 크다.(아이슬란드는 인구가 워낙 적어 아주 소국처럼 보이지만 면적으로는 남한과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집권여당 공천후보가 신생정당, 그것도 코미디언 출신에게 당했으니 기성정치인들이 받았을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상할 수 있다.

경관 아버지와 주방보조 어머니를 둔 크나르는 어릴 때 제대로 성인이 되리라고 예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아이였다. 5~7세까지 정신장애 치료를 받았고 독서장애에다 학습장애까지 겹쳐 고생했다. 거기다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HDH) 등 어린이가 겪을 수 있는 온갖 장애란 장애는 다 겪었다. 11살에 서커스 광대나 해적이 될 것이기 때문에 공부를 더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해 13살에는 드디어 학교 가기를 거부했다. 이후 크나르는 펑크록 밴드를 기웃대며 시간을 보냈다. 견디다 못한 부모는 14살에 결국 그를 십대 문제아들이 모이는 대안 기숙학교로 보냈다. 16살에는 부모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공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택시운전사도 하고 볼보자동차 조립라인에서도 일했다. 먹고살기 위해 록밴드를 시작했고 그런 다음 결국 아이슬란드 최고의 정치풍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성공했다.

그가 창당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처절한 무력감과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했다. 당시 아이슬란드는 은행이 파산하면서 영국과 네덜란드 예금자들에게 예금을 돌려줘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지에 대한 국가적 논쟁이 벌어졌다. 2008~2011년 아이슬란드는 국가부도까지 가는 금융위기를 겪었다. 금융위기 전 아이슬란드 은행이 신용도가 낮아 위험했지만 워낙 이자가 높아서 외국인 예금자들은 투기하는 심정으로 예금을 했다. 크나르는 '그런 부도덕한 외국 예금자의 돈을 왜 갚아야 하나?'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토론 웹사이트를 열었는데 반응이 너무 좋자 창당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당선 후 기자들이 창당한 이유를 묻자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월급 많이 받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내가 아는 친지들도 좀 돕고, 거기다가 보좌관에, 공짜로 즐길 것도 많고…."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농담이었다.

당 이름도 미국 가수 티나 터너의 '심플리 더 베스트'에서 영감을 얻었고 동시에 그 음악을 이용해 선거 홍보 비디오를 만들었다. 시민들과 당원들이 어울리면서 밴드 멤버들이 노래하고 크나르가 공약을 외치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파티 분위기로 만들었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지금도 유튜브에 'besti flokkurinn'이라는 아이슬란드어로 된 최고당 당명을 치면 이 홍보 비디오가 나온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단순한 필름인데도 공전의 히트를 쳐 표를 끌어모았다.

공약도 크나르처럼 정말 엉뚱했다. 모든 수영장에 공짜 수건 제공, 레이캬비크 동물원에 북극곰 사육, 병약자들을 위한 온갖 배려, 시내 한복판에 디즈니랜드 건설 같은 거창하지는 않지만 시민들에게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을 공약으로 만들었다. 정식 정강정책은 조금 진지하다. 사회의 기본인 가정을 돕고, 불운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며, 사회 전반의 부패를 척결하고, 누구에게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부문의 선명도를 제고하고, 부채를 절감하며, 학생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버스와 치과치료를 제공하고, 경제난을 불러일으킨 모든 책임자들을 법적으로 처벌하며, 성차별을 제거하고, 여성과 노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등이다.

그는 선거 유세를 하면서 이 공약으로도 사람들을 웃겼다. 공약을 내거는 자리에서도 "정치인이 반드시 공약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나도 정치인의 한 사람이므로 지금은 선심공약을 이렇게 마구 내걸지만 당선되면 지키리라고는 보장 못한다"고 말했다.(그는 그러나 4년의 재임 기간 중 그가 내건 공약은 대부분 지켰다.) 또 "다른 당은 숨기면서 부패했지만 우리는 드러내 놓고 부패하겠다"고도 말해 사람들을 웃겼다.

그는 투표 날도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다이 옷을 입고 투표하러 나오면서 농담으로 일관했지만 시정을 시작한 첫날부터는 대단히 진지하고 프로 정치인다워졌다고 언론들은 평했다. 당선되자마자 그는 미국 드라마 '더 와이어(The Wire)' 전 시리즈를 다 보지 않은 사람과는 연합정권을 만들지 않겠다고 주장해서 시민들을 웃겼다.(그가 이끄는 최고당은 15석 의회에서 6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과반수가 되기 위해서는 2석의 의석이 더 필요했다. 다른 당과의 연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 연합을 해서 시정부를 구성했는데 그는 "그들이 결국 더 와이어 5개 시리즈 60편을 다 보지 않고 그냥 대충대충 보고 줄거리만 익혔던 것 같다"고 불평했다.

이후 레이캬비크 시정은 그의 펑크록계 친구들이 점령했다. 펑크록계 친구들에게 시정을 맡긴 것이다. 시의 간부로 일하던 그의 친구들은 "선거 비디오 만들던 일이 도로에 얼마의 예산을 배정해 주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고 투정했다. 시정도 장난처럼 하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었지만 그를 주의 깊게 지켜보던 언론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언론들은 그가 시정을 맡은 지 1년도 채 되기 전에 전임 시장들과는 달리 롱런할 것이라고 점치기 시작했다. 크나르 전에는 4년간 시장이 4번 바뀌었다. 모두 1년을 채 못 버티고 나간 것이다. 언론들은 크나르를 향해 "그는 시장실에 잘 정착했고 전혀 웃기지 않고 실망스럽게도 잘하고 있다"고 빈정댔다. "나는 이 제도권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고 크나르는 말했는데, 이를 받아 아이슬란드 언론은 "정말 제도권 안으로 숨어 들어와 안에서 무너뜨렸다"고 했다. 어쨌든 그의 도전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크나르는 자신을 당선시킨 표는 단순한 '항의표(protest votes)'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2008년 있었던 아이슬란드 은행들의 연쇄 도산은 아이슬란드를 거의 붕괴사태로 몰아넣었고 그 여파로 유럽대륙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지금도 여진을 느낄 수 있는 유럽금융 사태의 시발점이었다.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그런 사태가 정부 내의 부패와 협잡, 정실인사, 태만, 무능력 등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고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어떤 인물이라도 좋으니 그전의 정치인만 아니면 된다는 공분을 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차에 인기 코미디언이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현실정치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아이슬란드 정치와 사회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코미디언에게 관심이 몰려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코미디언으로만 알았지 그의 정치적 능력이나 사상은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가 하는 말이 진지한 발언인지, 혹은 익살인지조차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특히 레이캬비크 시민들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낯익은 악마'인 구태 정치인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었다. 2009년 11월에 창당하고 6개월 만인 5월에 당선되었으니 알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다. 정말 바람에 의한 선택이었다. 이를 두고 크나르는 "전통적 정치가 실패를 해서 재미없는 나 같은 코미디언이 이 험악한 정치현실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익살을 떨었다.

크나르는 작년 말 자신은 선거에 더 나설 생각이 없다면서 최고당을 해체할 테니 당원들은 자매당인 '밝은 내일당(Bright Future Party)'으로 가라고 권했다. 선거에 나선다면 다시 압도적으로 당선될 것이라는 여론조사에도 불구하고 크나르는 물러났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내가 재선된다면 나는 정치인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될 수도 없다. 나는 코미디언이고 공연예술가이다. 나는 코미디언으로서 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조크와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너무 커졌고 심각해졌고 오래 끌었다. 이제 장난 그만하고 내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는 그답지 않게 "어떤 것이 웃긴다고 해서 그것이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이제 이탈리아 정치계의 풍운아 베페 그릴로(66·1948년생)를 얘기해 보자. 존 크나르가 40대로 SNS를 사용해 정치를 시작한 데 비해 베페 그릴로 '오성운동' 대표는 창당 당시 61세라는 비교적 늙은 나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특이하게 SNS를 너무 잘 이용하면서 정치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1980년대 아주 신랄한 정치 풍자 방송을 하도 해댄 나머지 여야 기성정치인들 모두에게서 미운털이 박혔다. 그래서 공영 TV는 물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소유하고 있던 민간 방송에서마저도 출연이 불가능해져 세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릴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해 시민들과 직접 얼굴을 맞댔다. 한계가 있는 일이었지만 명맥은 유지해갔다. 그러다가 1993년 공영 TV인 RA에 오랜만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이 프로그램 시청자 수가 1600만명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그가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 인정받았다는 뜻이고 시민들이 그를 간절히 원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 그는 SNS를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활동 근거가 된 웹사이트 'www.beppegrillo.it'는 인터넷 검색 엔진 테크노라티에 의하면 세계에서 10번째로 방문자가 많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웹사이트라고 한다. 이 웹사이트는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비롯해 특이하게도 일본어로도 제공된다. 자신의 웹사이트 대성공에 고무되어 그릴로는 2005년 웹사이트 '미트업(beppegrillo.meetup.com/)'을 다시 개설한다. 자신의 블로그 회원들에게 사이버상에서만 만나지 말고 동네별로 조직을 만들고 그 안에서 공통 관심사를 얘기하자고 권한다. 소조직을 만들어 소통하고 같이 행동하라고 권유한다. 이 또한 대성공을 거두어 현재 세계 21개국 6만127개 도시에서 16만8268명의 회원이 대체에너지, 정치와 행동, 지방정치, 정보자유 같은 1387개 소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결국 이런 SNS의 성공을 바탕으로 그릴로는 2010년 드디어 '오성운동'을 창당한다. 2013년 하원선거 당시 1만2000㎞를 직접 달려서 77개의 집회를 열었고 이탈리아 유권자의 4분의 1이 그의 운동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상하원 모두에서 약 26%의 유효표를 얻는 엄청난 결실을 거두며 이탈리아 정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하원의석 630개 중 104개, 상원 315석 중 40개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군소정당이 난립하는 이탈리아에서는 정말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득표수로만 보면 하원에서는 단일 정당으로는 최대의 당이 되었다. 그래서 언론은 '광대왕자(The Clown Prince)가 드디어 왕세자(The Crown Prince)가 되었다'고 꼬집었다. 오성운동은 이제 더 이상 '대체정당(alternative party)'이나 '언저리 정당(fringe party)'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일당으로는 제1당이나 어떤 정치 연합(block)에도 속해 있지 않아 집권당은 아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오성운동을 당(party)이라고 부르지 않고 운동(movement)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기존 정당들에 대한 깊은 회의와 의심 때문이다. 자신이 SNS나 정치콘서트를 통해 국민과 직접 만났듯이 요즘같이 통신수단이 발달한 현대에는 2500년 전 고대 아테네에서 쓰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도자나 법관은 '추첨 방식(sortition)'으로 뽑고, 의사결정은 전 주민이 참여해서 다수결로 결정하는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통한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통이나 소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시작된 기존의 대의정치는 용도를 다했다는 뜻이다. 인터넷을 통한 주민투표와 여론조사, SNS를 동원해 직접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당원 이외의 대중들과의 소통도 정강의 하나이고, 정부 정책에 대한 인터넷 사용자들의 참여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릴로는 이를 'E 민주주의'라 부른다. 그렇게 해야만 정치인들의 이해당략에 의해 이뤄지는 국정농간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릴로는 더 과격하게 나간다. "모든 정치인은 오로지 공복(公僕)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임기도 아주 짧거나 재선 이상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편다. 정치인을 국민의 피고용자로, 정치는 국민에게 하는 서비스로 여겨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모든 정치인은 원래의 직업에서 휴직을 하거나 정치를 부업으로 삼아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기간 임시직으로 봉사하며 직무를 수행하는 '봉직(奉職)'의 자세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인의 월급을 삭감하고, 각 정당에 지급되는 선거 자금 보조를 중단하고, 그 돈으로 이탈리아 경제의 척추인 중소기업 지원 자금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오성운동이 시정을 운영하는 시칠리아의 한 시에서는 이미 2012년부터 이를 시행하고 있다. 오성운동에 속한 의회의원들은 5000유로가 넘는 월급은 공익에 쓰도록 기부하고 있다. 오성운동은 선거자금 국고보조를 거부하고 웹사이트를 통해 당 지지자들이나 시민들로부터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자신들의 선거자금 4200만유로를 모았다. 쓰고 남은 40만유로를 지진 지역 학교의 운동시설 건설에 기부하기도 했다. 선거를 위해 국민이 내는 세금을 쓰지 않는 '제로 코스트(zero cost)' 정치를 하자는 뜻이다. 이런 정책을 비판하던 창당 주역은 출당시키기도 했다.

그릴로는 당 내에서 이견을 용납하지 않고 의견수렴 절차가 없다는 비난도 듣는다. 홍보의 시대인 요즘 당원들의 TV 출연도 금지시킨다. 이를 어긴 현직 하원의원을 출당시켰다. 2007년에는 브이데이(V-Day) 축제를 주최해서 범죄 전과가 있는 국회의원의 사임을 요구했다.(V는 이탈리아어 '꺼져버려!(vaffanculo!)'를 뜻하고 세계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andetta)'에서 나온 저항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V가 당 로고(MoVimenta)에 들어가 있다). 그가 이끈 2007년 V 집회에는 무려 200여만명이 참가했다. 블로그와 SNS를 통한 최초의 이탈리아의 대중운동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다음 해 집회 때는 '언론이 정치와 기업들에 의해 놀아나고 있다"는 그릴로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기업들은 이 집회에 자금을 보조했다. 언론도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주었다. 뿐만 아니다. 모든 정치인이 유권자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안달인 상황에서 그릴로는 유권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정치집회를 열었다. 로마의 농구장에서 열린 그의 정치집회에 참석하려면 30유로를 내고 들어와야 한다.

이런 그릴로의 오성운동을 언론은 '반제도권 시민네트워크(anti-establishment civic network)'라고 부른다. 이렇게 대중적인 집회를 통해 강력한 반제도권 운동을 펼치는 그릴로를 2013년 독일 중도좌파 주간지 슈피겔은 '파시스트이며, 인기영합 정치인으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를 향해서는 '정치에 직접 몸을 담그지 않으면서 옆에서 그냥 핏대만 올리며 훈수만 두는 비겁한 인간'이라는 평도 있다. '개그와 정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비아냥과 함께 '현실문제에 대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한다'는 비판도 있다.(그릴로는 자신이 과실치사 전과자이기 때문에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며 출마를 하지 않고 있다. 그가 몰던 차 사고로 3명이 죽은 일이 있다.) 비판자들은 또 '그릴로는 이상주의자이고 대중선동가여서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위험'이라고도 한다. 블로그나 광장집회처럼 오로지 일방적인 소통을 하는 방식만 원하지 대질심문을 당할 수 있는 자리에는 나타나기 싫어한다고도 비판한다.

그릴로는 자신을 이상주의자라고 비판하는 목소리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들어가면 이탈리아 정치에서 도둑도 없어지고 도난도 없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은 꿈이다. 우리들의 운동은 20~30년 뒤에나 이루어질 꿈이다. 지금은 아니고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자신이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활약으로 이탈리아 정치에 큰 지각변동이 있는 듯해도 결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현실정치의 높고 두꺼운 벽을 실감하고 있는 듯하다.

오성운동이 지금은 어차피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현실정치와 타협하지 않고 더욱 옆도 안 돌아보고 자신들만의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른다. 온 얼굴을 다 덮는 흰 구레나룻과 콧수염의 그릴로는 대중 집회를 할 때면 그가 반대하는 EU 깃발을 망토처럼 두르고 웨이브가 진 긴 흰머리를 날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껑충껑충 뛰면서 그의 카리스마에 취한 청중들을 거의 광기로 몰아넣는다. 그런 집회나 코미디 쇼에서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실명을 언급하면서 비판을 하도 많이 해 명예훼손 소송도 부지기수로 당했다. 그에게는 상설 전담 변호사 팀이 있을 정도다. 지난 3월 초에는 토리노와 리옹 간의 고속전철을 반대하는 시위 도중 철도 건물에 불법침입한 죄로 4주간 교도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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