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야, 집시는 출입금지란다" 빗장 거는 EU

2014. 3. 12.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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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보호, 집시만 빼고" 유럽의 실패한 정착·동화 정책

테리케 머조르(51·여)는 좁은 집 안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유럽연합(EU) 시민이 되고 지난 10년간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세 자녀는 엄마의 침묵이 깨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별로 달라진 게 없네요."

머조르는 헝가리 북동부 샤요커저의 빈민가에 사는 집시다. 무직이고 남편을 잃었다. 사회보장연금으로 매달 85유로(약 12만5000원)를 받는다. 헝가리인 평균 월급의 10분의 1쯤 되는 돈이다. 머조르는 쓰레기통을 뒤져 고철을 모으고, 이걸 팔아 생활비에 보탠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머조르의 삶이 유럽 집시 정책의 실패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유럽은 집시를 주류사회로 편입시킬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이런 의문이 커지고 있다.

◇제자리=과거 공산권 국가였던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등 8개국은 2004년 EU 가입에 앞서 기존 회원국과 협상했다. 서방은 EU 내 집시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집시는 주로 동구권에 몰려 있었다. EU는 수백억 유로를 쏟아부었다.

집시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건 머조르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들은 여전히 깊은 낙인이 찍힌 채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다. "뭔가 작동하지 않고 있어요. (집시의 삶에) 변화를 주려는 온갖 방안이 가동 중이지만 말이죠." 비올레타 냐데노바가 말했다. 열린사회유럽정책연구소(OSEPI)의 정책 분석가인 그는 "현장 상황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묘사했다.

올해부터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출신자는 다른 EU 국가에 정착하기 더 어려워졌다. 취업 제한 정책 때문이다. 두 나라는 가장 많은 집시가 쏟아져 나오는 지역이다.

EU 집행위원회 법무담당 집행위원 비비안 레딩은 "이민 논쟁의 핵심은 집시"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1000만∼1200만명 되는 유럽 시민이에요. 거의 모든 지역에 있고, 대부분이 지독한 가난 속에 살죠." 유엔개발계획(UNDP)의 2011년 조사에서 집시는 10명 중 9명이 빈곤층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은 절반이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생존의 문제=집시 차별 사례는 늘고 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특히 심하다. 한때 집시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앞장서 부르짖던 나라들이다. 벨기에 브뤼셀의 헤드비가 한코바(28·여)가 말했다.

"사람들이 저를 '더러운 집시'라고 부르는 건 더 이상 제게 상처를 주지 않아요. 문제는 제가 집시라서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는 거예요."

집시는 1400년대 인도에서 동유럽으로 넘어왔다. 이때 상당수가 노예로 전락했다. 일부는 방랑 생활을 선택했다. 집시는 1800년대 중반 노예제 폐지 후에도 하찮은 존재로 취급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땐 독일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150만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본다.

1945년부터 집시는 동유럽 사회에 흡수됐다. 집시는 정부가 제공한 집에 살며 단순노동을 했다. 열악한 지역에 따로 살긴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집시는 그 다음 닥쳐올 시장 시스템(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결국 극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죠." 컬럼비아 법학전문대학원 잭 그린버그 교수가 설명했다. 시민 권리 전문 변호사인 그는 2003년부터 집시 활동가들과 일해 왔다.

◇편견과 적대감=지금도 많은 유럽인이 '집시' 하면 거지를 떠올린다. 떠돌이 잡범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이런 편견은 또 다른 편견을 부추긴다. 집시를 남의 나라에 빌붙어 복지 혜택이나 따먹는 무임 승차자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UNDP가 벨기에의 집시 이민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는 다르다. 복지보다 구직을 위해 이주한 집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렇게 오래된 차별은 아주 끈질깁니다. 심지어 여러 지역에서 되살아나고 있죠. 집시들이 이동하기 때문이에요. 그 수는 실제로 얼마 안 되지만 말이죠." 히스 그레이브 OSEPI 소장은 이어 지적했다. "문제는 유럽 각국이 집시의 이주를 막는 데 훨씬 더 관심을 갖는다는 거예요. 그들이 모국에서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보다 말이죠."

집시에 대한 적대감은 정치 성향을 막론한다. 영국의 여성 정치인 필리파 로가 대표적이다. 그는 최근 런던 중심부에 거주하는 집시가 엄청난 혼란과 경범죄를 일으킨다며 이주 제한과 추방을 주장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에선 15세 집시 소녀가 쫓겨났다. 당시 집시의 생활 방식을 문제 삼으며 이 조치를 옹호한 사람은 사회주의자인 마뉘엘 발스 내무장관이었다. 국제앰네스티는 지난해 상반기 프랑스 집시촌에서만 1만명 넘게 쫓겨났다고 추정한다.

◇떠넘기기=EU가 2007∼2013년 집시 지원에 배정한 예산은 265억 유로(약 33조77억원)다. 결과는 의문이다. 2012년 UNDP 보고서는 "(정책) 효과가 불명확하다"며 "집시가 얼마나 혜택을 받았는지는 EU 각국에서 많은 정책 입안자를 괴롭히는 질문"이라고 전했다.

책임지려는 기관은 없다. EU는 각국 정부가 집시 지원 방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회원국들은 지방 정부에 책임을 돌린다. 지방 관료들은 자금과 지원이 부족하다고 불평한다.

영국 크라이스트처치대학 집시 학자 로라 캐시먼은 "EU가 집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모두가 말하지만 해당 지역 통제권을 주려는 회원국은 하나도 없다"며 "그게 진짜 문제"라고 말했다.

◇배척=집시에게 돈을 쓰는 게 오히려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시민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상황이 안 좋을 때, 집시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때 더욱 그렇다.

"집시들은 아무것도 안 해요. 우리는 게으른 그들한테 공짜로 돈을 줘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훔치고요. 이건 불공평해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수송업자 지오바니 이온(50)은 이렇게 덧붙였다.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어요. 집시는 항상 집시가 아닌 사람을 의심할 테고, 우리는 그들을 절대 우리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니까요."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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