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 실각을 계기로 본 중국의 정치 "나대면 죽는다"

김재동 기자 2012. 3. 2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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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재동기자]한 중화계 매체의 '내란 조짐' 보도까지 나왔던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薄熙來·63)의 실각사건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5일(현지시간) 보시라이 전 충칭(重慶)시 서기 가족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 사업가 네일 헤이우드의 죽음에 대해 영국정부가 중국정부에 조사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네일 헤이우드는 지난해 11월 충칭의 한 호텔에서 사체로 발견됐으며 당시 충칭 당국은 그의 죽음을 과도한 알콜 소비로 결론짓고 부검없이 서둘러 화장해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은 헤이우드가 독살됐을 가능성과 보시라이의 부인이 헤이우드와 사업상 분쟁에 연루돼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후진타오로부터 시진핑으로의 권력이양을 앞두고 벌어진 '보시라이 사건'은 마오쩌둥 이후 계속되고 있는 중국의 정치현실을 보여준다.

"나대면 죽는다."

◆귀족 코뮤니스트 보시라이의 예고된 종말

지난 14일 중국의 전인대가 끝나고 '충칭시의 포청천'으로 불리며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가 해임됐다.

오는 가을 후진타오로부터 태자당 동료 시진핑으로 권력이 옮겨가기 몇 달 전에 정치적으로 졸(卒)한 것이다.

중국의 권력파벌은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에 연고를 둔 파벌), 태자당(太子黨·혁명원로나 고관의 자제 출신), 공청단(共靑團·공산주의청년단 출신 정치인)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태자당과 상하이방 연합세력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이끌고 있고 후진타오(胡錦濤) 현 주석은 공청단파 출신이다. 원자바오총리는 중립이지만 후 주석 쪽에 가깝다.

보시라이는 중국의 8대혁명원로로 꼽히는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의 차남이다. 역경이라곤 몰랐던 혁명귀족이었다.

이에 반해 시진핑은 그 부친이 중공원로로 전국인대상위회부위원장을 역임했던 시중쉰이었다. 시진핑이 10세 되던 해인 1962년 9월 중공 8차 십중전회상에서 '시,자,류 반당집단'으로 몰려 그해 10월 시중쉰은 당내외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더하여 허난성 뤄양의 공장으로 하방되었을 뿐 아니라 1968년에는 옥살이까지 하게 되었다.

부친과 함께 하방된 시진핑은 1969년 1월 15세의 나이로 산시성 옌촨현의 공장에 들어갔고 이후 그곳 생산대의 중공당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1975년 10월 칭화대학 화학공정계에 입학하고 이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9년 졸업 후 시진핑은 국무원판공청, 중앙군위판공청에서 근무하였으며 중공중앙정치국위원, 국무원부총리, 중앙군위비서장등을 거쳤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인물이다.

이에 반해 보 전 서기는 다롄(大連)시장 및 당서기를 거쳐 랴오닝(遼寧) 성장, 상무부장으로 승승장구해왔다. 아버지 보이보가 장쩌민의 후견인역을 톡톡히 해낸 덕이다. 그러나 2007년 1월 아버지가 타계하면서 후광이 사라졌다. 그해 10월 열린 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진출에 실패하고, 상대적으로 한직인 충칭시 당서기로 밀려났다.

보시라이는 문혁 와중에 열혈 홍위병으로 활동했다. 마오쩌뚱의 4번째 부인 장칭(江靑)이 보이보 부총리를 '반당분자'라고 선포했을 때는 아버지 보이보를 직접 때리기도 했을 정도다. 열혈홍위병 출신 보 전 서기는 문화대혁명(1966~76년)에서 활로를 찾았다.

소외계층의 인기를 얻는 정책이 그가 발견한 살 길 이었다. 인구 3100만 명으로 세계 최대 도시인 충칭에서 61%를 차지하는 농민공들의 신분을 도시민으로 바꿔줬다. 충칭에 7층 높이의 마오쩌둥 동상을 세우고, 문화대혁명을 방불케 하는 '창홍타흑(唱紅打黑:홍가를 부르고 독버섯들을 징치한다)' 운동을 전개했다. 130만 명의 빈곤 가정 어린이들에게 매일 우유와 계란을 무상 지급했다. 보 서기의 인기영합적인 분배 정책은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보시라이의 정책은 후진타오-원자바오의 눈에서 벗어났다.

원자바오는 "문화대혁명의 잔재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고 질타했다. 보시라이의 인기영합정책을 겨냥한 발언이다.

알려지기로 장쩌민-후진타오까지의 권력승계는 故 덩샤오핑 주석의 안배에 따른 것이다. 덩샤오핑의 유훈없이 처음으로 후계를 지명하는 후진타오 등에게 보시라이는 튀는 돌이다. 하방까지 경험하며 은인자중이 몸에 밴 시진핑에게 권력을 넘겨주지만 보시라이까지 같이 숟가락을 얹는 꼴은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싶다.

중국의 역사에서 이렇게 나대다 스러진 인물들은 드물지 않다.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이 가오강(高崗(고강), 1905?~1954)이다.

◆五馬進京一馬當先 (오마진경 일마당선) 주인공 가오강 비극적 자살

1952년 마오는 총애하는 동북국 제1서기 가오강을 새로 만든 국가계획위원회 수장에 앉혔다. 국가계획위원회는 국민경제계획과 예산을 다루는 최고 행정기관이었다.

당시 47살의 가오강은 단번에 실세의 반열에 올라 주목을 받았다. 주석인 가오강은 이 직을 맡기 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중공 동북국 제1서기, 동북인민정부 위원회 주석직에 있었다. 부주석은 동남국 제2서기 등즈후이였으며, 위원으로는 천윈, 덩샤오핑(鄧小平), 펑더화이(彭德懷), 린뱌오(林彪), 라오수스(饒漱石), 펑전(彭眞 팽진), 보이보(薄一波) 등 십 수 명이었다.

이때 사람들은 가오강이 지역에서 올라 온 5명의 서기 중 가장 잘 나간다는 뜻으로 "현재 5마리의 말이 서울로 올라 왔는데, 한 마리가 앞장서고 있다(五馬進京一馬當先 오마진경 일마당선)"고 빗댔다

하지만 권력에 취한 가오강은 "총구에서 당이 나온다", "당은 군대가 창조한다"는 이론을 내세워 마오가 제기한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원칙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사실은 휘하의 등소평등에 의해 마오에게 알려졌고 1954년 2월 마오의 건의에 따라 베이징에서 열린 7기4중전회에서 '반당분열'을 추궁당해 자살하고 만다.

◆'대약진운동' 성토 류사오치 [劉少奇(유소기), 1898.11.24.~1969.11.12] 문혁에 지다.

1958년 시작된 마오쩌뚱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났다. 인구가 4000만명이나 감소하는 대기근을 경험했다.

1962년 1월 11일, 베이징에서 '7000인 대회'가 열렸다. 전국의 성·자치구·현·공기업·군부대의 5급 이상 7118명이 참석해 24일간 열린, 전대미문의 대형 회의였다. 중앙을 대표해 1959년부터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직을 수행한 류샤오치가 공작보고를 했다.

류샤오치는 "하늘이 내린 재앙은 3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인간이 만든 재난(人禍)"이라며 대약진운동을 지지한 마오에 대한 비판을 감행했다.

하지만 마오가 주도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권력회복을 노리는 마오와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주자파(친자본주의적 인물)의 우두머리", "반혁명분자"로 비판을 받고 1966년 당 부주석에서 물러났다. 1968년 중앙정부에서 실각한데다가 당에서까지 제명당한후 베이징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별다른 의료처치를 받지 못한 채 당뇨병, 폐렴 등의 지병이 악화되어 1969년 11월 12일 사망했다. 유해는 화장되었고, 중국정부는 그의 사인을 "병사"라고 발표하였다.

◆동북을 휩쓴 전쟁영웅 린뱌오 [林彪(임표), 1907.12.5~1971.9.13]의 추락사

1937년 팔로군(八路軍) 115사단장으로 일본 관동군을 격파한 핑싱관[平型關] 전투의 전쟁영웅 린뱌오는 류샤오치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들어 마오를 공박한 이틀 뒤인 1962년 1월13일 정반대로 마오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다.

그는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연임하고 펑더화이의 뒤를 이어 국방부장이 되었다. 그는 군 내부에서 마오쩌둥 사상 학습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65년 〈인민전쟁 승리 만세〉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마오쩌둥의 '농촌으로 도시포위' 전략을 세계 전략으로 확대하였다. 1967년에는 마오쩌둥·장칭과 함께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

군(軍)을 이용하여 당 서기였던 류사치오[劉少奇]를 실각시키고 대약진 운동 이후 실각했던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는데도 앞장섰다. 1969년 중국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천재론을 주장하여 개인 숭배까지 나섰고 자신이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

린뱌오는 이 회의를 통해 장칭을 견제하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였으나, 오히려 류사오치에 데인 바 있는 마오쩌둥의 의심을 산다. 결국 린뱌오는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고 1971년 8월 공군에 복무 중인 아들 린위궈[林立果]와 함께 마오쩌둥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탈출하여 소련 이르쿠츠크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몽골 지역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당시 중국정부는 추락이유를 연료부족이라 밝혔다.

가오강, 류사오치, 린뱌오는 모두 마오의 아끼는 수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튀는 행동으로 인하여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

세 번의 실각 끝에 정권을 잡아 '부도옹'이라 불리는 덩샤오핑의 치세하에서도 이런 비극은 계속된다.

◆후야오방 [胡耀邦(호요방), 1915.11.20~1989.4.15]

◆자오쯔양 [趙紫陽(조자양), 1919.10.17~2005.1.17]이 그들이다.

덩샤오핑은 1984년 일본수상과의 회담에서 "하늘이 무너져도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이 있는 한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할 만큼 두 사람을 총애했다. 천윈- 야오이린-리펑등의 보수주의자들을 넘어 경제개혁을 이루기 위해 두 사람은 없어선 안될 동지이자 후계자였다.

먼저 팽 당한 것은 후야오방였다. 마치 선조나 영조의 양위파동처럼 은퇴하고자 하는 덩샤오핑의 의중을 넙죽 받아든 것이 후야오방이다. 당연히 덩샤오핑 세대 원로의 눈 밖에 났고 때마침 벌어진 민주화시위의 귀책자가 돼 중앙서기처 총서기직에서 사임하고만다.

다음이 자오쯔양.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차기 주석자리가 예약돼있던 자오쯔양은 1989년 천안문사태가 벌어졌을 때 덩샤오핑의 강경진압을 수용치 않고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한다. 덩샤오핑은 격노했고 그의 자리는 정적 리펑에게 돌아간다. 또 차기 주석자리도 상하이 당서기 장쩌민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평생 중국의 경제개혁을 꿈꿔온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최측근 후진타오와 자오쯔양의 비서였던 원자바오를 4세대 후계자로 지명해 현재의 중국을 이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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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재동기자 zait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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