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강진>한국 유학생들의 기적같은 지진지역 탈출기

2008. 5. 1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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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간 산사태.추위.수재 피해 악전고투..영화같은 구사일생

(청두=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톈진(天津)외대에 유학중이던 백준호(25)씨가 부산외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와 있던 안형준(26)씨와 함께 졸업 기념으로 중국 일주 배낭여행을 계획한 것은 한달여전쯤.

이들의 여행 계획 소식을 듣고 톈진외대에서 함께 수학중이던 김동희, 김소라, 손혜경씨 등 여학생 3명이 합류했다.

이들은 톈진에서 시안(西安)을 거쳐 쓰촨(四川) 일대를 관광한 다음 장자제(張家界), 황산(黃山)을 거쳐 톈진으로 귀환하는 2주일간의 배낭 여행 계획을 짰다.

지난 6일 톈진을 출발해 순조롭게 중국을 일주하던 이들이 생사의 고비를 맞은 것은 지난 12일 주자이거우(九寨溝)와 워룽(臥龍) 판다보호구역의 관광을 마치고 청두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현지에서 빌린 7인승 렌터카의 선루프를 열어제치고 협곡 사이의 3천∼5천m 높이의 기암 절경을 바라보며 달리던 이들은 오후 2시30분께(현지시간) 해발 6천250m의 스구냥(四姑娘)산을 앞에 두고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우르릉 소리를 들었다.

산위에서 거대한 바위, 돌덩이가 비처럼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차량을 정지시키자 산위에서 쏟아진 흙과 바위 더미에 떼밀려 차량은 3m 아래 계곡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전복된 차량속에서 일단 동료들의 안전을 확인한 이들은 무작정 차량에서 기어나와 쏟아지는 바위, 돌덩이를 피해 사방으로 튀어갔다.

물에 젖었던 신발을 차량에 벗어뒀던 것이 실책이었다. 맨발로 달려내려가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던 리더 백씨는 곧 일행을 불러모아 다시 계곡으로 달려내려갔다.

그 사이에 집채만한 바위가 내려가던 안씨의 머리 위를 지나 바로 앞에 꽂히기도 했다. 마치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폭탄 세례에 뒤를 쫓기듯 이들은 사방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를 피해 급경사의 산악을 1㎞ 가량을 뛰어내려갔다.

"아, 이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백씨의 머리를 스쳤다. 우물안으로 돌 더미가 쏟아져 내리는 형국이었다.

정신없이 내려가자 폭이 30m 정도 되는 공터가 나타났다. 큰 바위 뒤에 중국 주민 3명이 벌벌 떨면서 피신해있는 것을 보고 이들도 함께 몸을 숨겼다. 이들은 계속 바위 세례가 이어지자 반대편 계곡으로 피신하려고 각자의 옷을 묶어 구명용 끈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찬 물길의 계곡 하천은 이들의 도강을 허용치 않았다.

도강을 포기한 이들은 바위 세례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함께 빠져나오지 못한 렌터카 운전기사를 찾으러 조난 지역으로 다시 올라갔다.

운전기사는 머리와 옆구리, 팔 등에서 피를 철철 흘린채 몸이 차량에 끼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운전기사를 빼내려 좌석을 칼로 뜯어내는 등 2시간여 사투를 벌이던 중 다시 바위와 돌덩이가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운전기사는 숨지고 말았다.

결국 이들은 운전기사 구조를 포기한채 바위 세례를 피하려 산위로 올라갔다. 카메라도 버리고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만 챙긴 이들은 바위와 돌을 징검다리 삼아 3㎞ 가량을 올라가던 이들은 수력발전용 댐 옆의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주변에는 현지 마을 주민 15명이 피난을 나와있었다.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있던 이들을 안심시키면서 이들에게 죽을 끓여주고 옷가지를 나눠줬다. 말은 안 통했지만 재난을 함께 헤쳐나간다는 동지 의식이 생겨났다.

저녁이 되자 추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결국 추위를 못이기고 주변에서 발견한 한 폐가로 들어갔다. 잠을 청하던 중 폐가가 갑자기 여진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 급하게 뛰쳐나왔다.

결국 바위 주변에서 나무판을 끌어모아 옷가지로 텐트를 만든 이들은 노숙을 해야 했다. 각자 지니고 있던 종이를 끌어모아 불을 피웠다. 결국에는 있는 지폐도, 학생증도, 옷가지도 모두 태워서 불을 피워야 했다.

유학생들은 이후 동굴 주변에서 주민들과 함께 12일부터 14일까지 사흘간 지진으로 사망한 주민들의 장례식도 거들고 구조를 기다리며 노숙 생활을 계속했다.

구조대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댐 호수의 수위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동굴 앞 20㎝까지 물이 차오른 것을 발견했다.

이미 조난됐던 사고지점은 물에 잠겨있었다.

주민들과 함께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한 이들은 15㎞를 걸어 폭포 옆의 한 산장을 발견했다. 산장에선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계속 산장에서 지내기는 여전히 불안했다.

하룻밤을 산장에서 지낸 이들은 다시 더 큰 지진이 발생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에 다시 발길을 옮겼다.

16일 오전 6시에 산장을 나선 이들은 산길 10㎞를 걸어 6시간30분만인 낮 12시30분께 진앙지인 원촨(汶川)현 잉슈(映秀)진에 도착했다. 잉슈진 근처에 구조활동을 벌이던 인민해방군 군인 30여명이 이들을 맞았다.

백씨는 "이제 살았구나"하는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잉슈에 도착한 이들은 중국 무장경찰이 마련한 간이 막사에서 나흘만에 처음으로 발을 뻗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백씨는 자신의 발이 다친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에서 부상했는지도 기억이 안났다. 걸음 뒤를 돌아보면 발자국에 피가 묻어났다.

인민해방군 의료단은 이들에게 신체검사를 실시하고 상처 부위를 치료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중국 군인과 경찰로부터 두손으로 들지못할 만큼 많은 과자, 컵라면 등 음식을 안겨받고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진앙지 잉슈에선 최고 규모 5.9의 여진이 계속되면서 여전히 이들을 불안케 했다. 복구 공사를 하고 있던 막사 위 타워크레인이 무너지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잠을 제대로 청할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17일 아침을 맞았지만 헬기를 이용, 청두로 나가려던 계획도 틀어졌다. 잉슈에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청두를 오가는 헬기 이착륙이 어려워진 것이다.

이들은 결국 10㎞를 걸어 민(岷)강 하류의 뱃길을 이용키로 했다. 걷기가 힘든 손씨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보트를 탈 수 있는 임시 부두로 가야했다. 이재민들이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었지만 이들은 중국 군인들의 배려로 쉽게 보트를 얻어탈 수 있었다.

한시간여 배를 달린 끝에 드디어 이들은 쯔핑푸(紫坪鋪) 댐 주변에 마련된 임시 부두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중국군 차량으로 청두의 인민해방군 의료단 병원으로 후송됐다.

이들이 청두에 도착한 것은 17일 오후 9시. 5일간의 기나긴 사투가 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백씨는 "지진 이후 유일한 희망은 잠을 편하게 자고 싶었던 것"이라며 "강행군을 재촉한 것에 다소 죄책감이 들기는 하지만 동생뻘 여학생들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말을 잘 따라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jo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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