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깊이보기]클린턴 후보 탄생까지 240년..여성들의 '미국 대통령' 도전사

이인숙 기자 2016. 6. 13.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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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7일 뉴욕 브룩클린 네이비 야드 행사장 연단에서 활짝 웃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힐러리클린턴인스타그램

지난 7일 밤(현지시간)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 뉴욕 브룩클린 네이비야드 연단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두 손을 활짝 벌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마지막 경선인 캘리포니아 등 6개주 경선에서 경쟁자 버니 샌더스를 가뿐히 이기면서 미국의 첫 여성 대선후보가 된 순간이었다.

클린턴은 “장벽이 허물어졌고 정의와 평등이 승리했다”며 “이번 경선은 우리에게 더 이상 유리천정은 없다는 걸, 더 이상 한계는 없다는 걸 못박았다”고 말했다. 미국 역사는 클린턴을 240년 역사상 첫 여성 대선후보로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240년은 한계에 직접 부딪치며 무수한 ‘처음’의 기록을 써 온 여성들의 도전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다.

■여성 투표권도 없던 시절, 대선 후보 선언 빅토리아 우드헐
미국 대선에 처음으로 출마한 빅토리아 우드헐 |위키피디아
미국에서 가장 최초로 대선에 출마한 여성은 1872년 빅토리아 우드헐이다. 당시는 여성이 투표도 할 수 없던 시절이다. 미국 헌법은 1920년에야 여성의 참정권을 명시했다. 15살에 만난 남편과 첫 결혼에 실패한 우드헐은 자유연애주의자가 됐고 여성의 권리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뉴욕에서 지식인이 모이는 살롱을 만드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한 우드헐은 월스트리트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주식중개소를 낸 인물이기도 하다.

1871년 국가여성참정권협회(NWSA)와 인연을 맺은 우드헐은 이듬해 NWSA의 분파 개혁그룹에 의해 여성평등당의 대선후보로 지명됐다. 그러나 우드헐은 한표도 얻지 못했다. 그가 발간하던 잡지에 유력 남성인사들의 위선을 고발하기 위해 섹스 스캔들을 폭로했다가 음란물 출판 및 비방으로 체포돼 대선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대선 투표용지에 여성으로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변호사 벨바 락우드 |위키피디아

우드헐의 도전 후 10여년이 흐른 1884년 또 다른 여성이 대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변호사 벨바 락우드다. 락우드는 교사로 일하다 뒤늦게 법에 관심을 갖게 돼 마흔에 콜럼비아 칼리지 로스쿨(현 조지워싱턴대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동료 남학생의 반대로 학위도 받지 못할 뻔 했다. 락우드는 당시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에게 청원해 학위를 받아냈다. 그러나 락우드는 변호사 자격을 거부당했다. 기혼여성은 법적 자격이 없어 계약을 체결하거나 누군가를 대리해 법정에 설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의회에 끈질기게 청원해 변호사 자격을 갖춘 여성이면 변론을 할 수 있도록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만들었다. 락우드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대법원 법정에 선 변호사가 됐다.

■처음으로 대법원 법정에 선 변호사, 벨바 락우드
우드헐의 대선출마가 상징적인 수준이었다면 락우드는 국가여성평등당 후보로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했다. 대선 투표용지에 여성의 이름이 오른 것은 락우드가 처음이다. 락우드는 공식적으로 4149표를 얻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그가 받은 표는 상당수가 집계되지 못하고 파기됐다. 4년 뒤에 재출마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락우드는 “여성은 뽑을 수 없지만 뽑힐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1920년 출마한 여권운동가 로라 클레이는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거명된 여성후보였다. 클레이는 노예제에 반대했던 켄터키의 유명 정치인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의 딸이다. 켄터키 태생 유명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개명 전 이름이 클레이의 아버지 이름을 딴 것이다. 여성의 평등한 정치 참여를 주장했던 클레이는 역설적이게도 흑인의 참정권은 찬성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공화당 경선에 처음으로 도전한 마가렛 체이스 스미스. 1950년 매카시즘에 반대하는 ‘양심선언’ 연설문을 읽어보는 모습. |마가렛 체이스 스미스 도서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여성 후보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민주당보다 40년 넘게 늦은 1964년이다. 마가렛 체이스 스미스는 미국에서 상·하원 의원을 모두 지낸 첫 여성 정치인이다. 스미스는 반공주의자였지만 공화당 내에서 처음으로 조셉 매카시의 공산주의자 마녀사냥에 반대하며 1950년 상원에서 ‘양심선언’ 연설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류 정당 대선후보 첫 도전, 첫 흑인 의원 셜리 치좀
공화·민주 양당을 통틀어 대선에 도전한 첫 흑인의 역사도 여성이 썼다. 1972년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셜리 치좀이다. 그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152명을 확보했다. 간호학교 교사였던 치좀은 지역정치에 눈뜨게 돼 1968년 브룩클린 의회에 입성했다. 의회에 진출한 첫 흑인 여성이었다. 치좀은 여성운동 외에도 베트남전 반대 등 평화운동에도 매진했다.
미국 대선에 처음으로 도전한 흑인 여성 셜리 치좀. |위키피디아
2000년 공화당 대선 경선에 뛰어든 엘리자베스 돌은 1996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맞붙었던 공화당 대선 후보 밥 돌의 부인이다. 돌은 1980년대 노동부·교통부 장관을 지내고 2003~2009년 노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을 지낸 유명 정치인이다. 그는 경선 출마 후 500만 달러를 모금했지만 첫 경선 전에 포기했다. 2004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던 캐롤 모슬리 브라운도 모금 부족으로 그해 1월 경선을 중단했다.
■첫 여성 부통령 후보, 제럴딘 페라로
의회 내 공화당의 ‘티파티 코커스’ 회장이었던 미셸 바흐만은 2011년 이듬해 대선을 바라보고 선거운동을 시작했지만 경선이 시작되기 직전 접었다. 올해 공화당 경선에 도전했던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 패커드 최고경영자(CEO)도 저조한 지지율로 경선이 막 시작된 2월 중도하차했다.

경선에서 의미 있는 득표를 하며 완주한 예는 2008년,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유일하다. 올해 대선에서 클린턴 외에 여성후보로는 녹색당 후보 질 스테인이 있다. 환경운동가이자 의사인 스테인은 2012년에 이어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11일 뉴욕타임스는 ‘클린턴의 (역사적인) 순간’이 오기 34년 전에 있었던 제럴딘 페라로를 조명했다. 페라로는 1984년 대선 때 민주당 월터 먼데일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으나, 먼데일이 고배를 마시는 바람에 사상 첫 여성 부통령이 되는 데에 실패했다.

미국의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8일 CNN과 인터뷰에서 “클린턴이 민주당 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된 것은 버락 오바마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 자주 배제되는 이 나라의 다수를 대변하기 때문”이라며 “오바마와 클린턴의 승리는 (다수지만 소수였던) 사람들이 스스로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서고 또 그들을 대변하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인숙 기자 sook9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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