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게으른 베짱이는 없었다"

2016. 7. 1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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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독일의 기본소득 캠페인 ‘마인 그룬트아인콤멘’ 프로젝트 운영책임자 아미라 예히아 인터뷰

전세계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연대 조직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16차 세계총회가 7월7~8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에서 열렸다. 세계총회가 아시아 국가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다. 총회에는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을 쓴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대학 교수, 기본소득 이론의 틀을 마련한 필리프 판 파레이스 벨기에 루뱅대학 특별객원교수, 카탸 키핑 독일 좌파당 공동대표 등이 참석했다. ‘기본소득’은 재산, 노동,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아무 조건 없이 지급되는 일정한 액수의 소득을 뜻한다. <한겨레21>은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은 기부금을 매달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실험을 진행 중인 독일의 기본소득 캠페인 프로젝트와 농민 기본소득에 주목했다. 최근 기본소득을 부쩍 자주 언급하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속내도 함께 살펴봤다. _편집자
독일에서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기본소득을 나눠주는 ‘마인 그룬트아인콤멘’(나의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아미라 예히아. 김진수 기자

1년간 매달 1천유로(약 128만원)을 받는다면 당신은 뭘 할 건가요?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니다. 독일에서 2014년부터 진행 중인 흥미로운 실험이다. ‘마인 그룬트아인콤멘’(mein-grundeinkommen.de, 나의 기본소득)이라는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46명에게 1년간 월 1천유로를 지급했다.

크라우드펀딩 형식으로 4만5천여 명이 자발적으로 쌈짓돈을 내놔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했다. 기본소득을 받는 대상자는 매달 추첨으로 선정한다. 지금까지 기본소득을 받은 46명의 삶은 ‘기본소득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의제가 국민투표 형식으로 널리 퍼졌다면, 독일에선 크라우드펀딩과 시민운동의 결합이라는 형식으로 기본소득 공감대가 넓어졌다. 기본소득 논쟁을 도서관 밖 대중 광장으로 끌고 나온 셈이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16차 세계총회에 특별 초청된 아미라 예히아 ‘마인 그룬트아인콤멘’ 프로젝트 운영책임자를 7월7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만났다. 개발경제학을 전공한 예히아는 아프리카 남서부 나미비아의 한 마을에서 2년간 진행된 기본소득 파일럿 프로젝트 논문을 읽으면서 기본소득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2007~2009년 나미비아의 빈부 격차가 심한 어느 마을에서 교회와 시민단체가 주민들에게 한국돈 1만5천원가량의 기본소득을 매달 지급하면서 삶의 변화를 추적한 프로젝트가 진행된 바 있다. 대학 졸업 뒤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던 예히아는 2015년 3월부터 ‘마인 그룬트아인콤멘’ 프로젝트에 결합했다.

4만5천 명 넘는 사람 참여한 실험

처음 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누구 머릿속에서 나왔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출신 미하엘 보마이어가 프로젝트 설립자다. 그가 창업한 인터넷 스타트업이 잘돼서 월 1천유로의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게 됐다고 한다. 보마이어는 업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거나 딸을 돌볼 수 있게 됐다. 그는 ‘나처럼 모두가 기본소득으로 월 1천유로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고 이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 무렵 나도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비슷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구상을 털어놨더니 보마이어를 소개해줬다.”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캠페인을 시작할 때 이렇게 사람들이 호응해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스타트넥스트’라는 독일의 유명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통해 돈을 모았는데, 3개월 만에 기부금이 5만유로 넘게 들어왔다. 처음에는 한 사람에게만 기본소득을 지급할 계획이었는데, 5명에게 1년간 각각 1만2천유로를 줄 만큼 돈이 모였다. 페이스북과 인터넷으로 홍보했지만 뜻밖이었다.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았다. 설립자 보마이어가 인터뷰를 많이 했고, 최근에는 내가 텔레비전 생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500만 명이 시청하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웃음) 따로 홍보비를 집행하거나 기업 투자를 받지는 않았다.”

지난 2년간의 성과를 간략히 소개해달라.

“지금까지 4만5천 명 넘게 기부에 동참했고, 46명이 1년간 기본소득을 받는 대상자가 됐다. 지급 대상자는 매달 추첨으로 뽑는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기본소득 신청을 할 수 있고, 매달 기부액이 모인 만큼 대상자 수를 정해 추첨한다. 기부액 1만2천유로가 모이면 1명을 뽑는 식이다.

지금도 홈페이지에선 47번째 대상자를 위한 기부금을 모금 중이다. 지난 6월 진행한 마지막 추첨에는 15만 명이 몰렸다. 이 중에서 3명을 뽑았으니 경쟁률이 5만 대 1인 셈이다. 홈페이지 가입자와 기부자 수도 매달 늘어나고 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처음 2명으로 시작한 프로젝트팀 활동가 규모가 지금은 18명으로 늘었다. 팀 운영도 100% 기부금으로 이뤄진다. 기본소득 기부금과 별개로 비영리단체 자체에 대한 기부도 있다. 현재 월 8만유로 정도 기부금이 들어온다. 나도 처음 5~6개월은 돈을 받지 않고 자원활동가로 일했지만, 이제는 월급을 받는다. (웃음)”

1살 아기부터 퇴직자까지 누구나

독일 ‘마인 그룬트아인콤멘’ 홈페이지에는 1년간 기본소득 월 1천유로를 받은 46명의 프로필과 사연이 소개돼 있다. ‘마인 그룬트아인콤멘’ 홈페이지 갈무리 

경쟁률이 높으면 추첨 결과에 대한 불만은 없나.

“최대한 공정하게 추첨하려고 한다. 기본소득 지급 대상자가 되고 싶다고 신청하면 번호를 부여받는다. 예전에는 커다란 주사위를 던져서 번호를 결정했는데, 주사위 던지는 힘의 강도를 조절해서 조작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난해부터는 원형으로 된 룰렛(돌림판)으로 추첨 방식을 바꿨다.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라이브, 유튜브 채널 등으로 추첨 과정을 생중계한다. ‘나의 기본소득’ 캠페인이 어떤 의미가 있고 프로젝트팀 활동이 무엇인지 소개한 뒤, 마지막에 추첨을 진행한다.

‘마인 그룬트아인콤멘’ 홈페이지에 가면 지금까지 기본소득을 받은 46명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돼 있다. 1살 아기도 있고 폐질환 환자, 대학원 학생, 퇴직자 등 다양하다. 연령, 성별, 인종, 재산과 소득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일정 소득을 지급한다는 기본소득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신청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14살 미만 어린이는 부모 계정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운 좋게 당첨된 대상자는 기본소득을 어디에 썼고, 기본소득을 받는 동안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동영상이나 글로 기록해둔다.”

예히아는 유치원 교사가 된 젊은 남성 크리스토프의 사연을 소개했다. 크리스토프는 콜센터에서 일했다. 원래 꿈은 유치원 교사이지만, 콜센터의 저임금과 높은 업무 강도 탓에 교육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기본소득 지급 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콜센터를 그만두고 유치원 교사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월 1천유로의 기본소득이 보장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유치원 교사가 되는 데 성공했고, 이제는 결혼해서 곧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다. 크리스토프는 “지금 다니는 유치원에서 유일한 남성 교사”인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고 예히아는 전했다.

안정감 얻으며 기부, 교육, 재취업

7월7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16차 세계총회 행사장 앞에서 참가자들에게 ‘가상의 기본소득’ 바우처를 나눠주는 모습. 김진수 기자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쪽에선 아무런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게으른 베짱이’가 많아질 거라고 우려한다. 실제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기본소득을 받은 다음에 ‘베짱이’가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실직 상태였던 3명은 직업훈련이나 추가 교육을 받는 데 기본소득을 사용했다.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학교 진학이나 교육 프로그램 등록 등 새로운 길을 찾아가려고 노력한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기본소득의 일부를 다시 기부한 사람이 65%나 된다.

기본소득은 ‘안정감’을 준다. 일자리와 소득에 대한 불안이 큰데, 기본소득을 받으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니 ‘앞으로 내가 뭘 하며 살고 싶은지’ 고민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퇴직자나 실업자가 기본소득을 받음으로써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독일에서도 좌파당이나 녹색당 등이 기본소득에 좀더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안다. 프로젝트팀이나 기부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편인가.

“기본소득을 좀더 인간적인 사회,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리 팀은 비슷하다. 하지만 투표 성향은 좌파당, 녹색당 등 제각각이다. 기부자들의 정치적 성향도 확언할 수 없다. 다만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미래 담론으로서 가치 있다고 여기고 그런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기부한다는 점에선 비슷한 색깔을 띤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목표는.

“100명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할 때까지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이후에 뭘 할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독일 인구 8천만 명에 견줘 100명은 작은 수이고 의미 있는 통계치가 아닐지 몰라도, 기본소득이라는 낯선 의제를 친숙해지도록 만들었다는 데 만족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처럼 아래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고, 사회적 담론이 변화하면 결국은 정치가 변할 것이다.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정치의 변화를 꾀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크라우드펀딩에 이어 소비와 연계된 여러 실험을 하는 이유다.”

자본주의를 해킹하는 아이디어

‘마인 그룬트아인콤멘’은 아마존 등 인터넷 쇼핑을 할 때 구매액의 일부를 기본소득 캠페인에 기부하도록 팝업창을 띄우는 ‘크라우드바’, 가맹점 1천여 곳에서 구매액의 일부를 자동 기부하도록 한 ‘크라우드카드’ 등을 통해서도 기부금을 모으고 있다. 콜라 구매액의 5%를 캠페인에 기부하는 ‘기본소득 콜라’도 제작해 판매 중이다. 콜라에는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뭘 하고 싶습니까?’라는 내용의 광고 문구가 붙어 있다. 예히아는 “우리 자체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해킹하는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이같은 실험이 가능할까? 예히아는 대답했다. “저스트 두 잇(Just do it).” 크라우드펀딩,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통로가 있으니 일단 시작해보라는 말이다. 미국과 스위스에서도 최근 비슷한 방식의 ‘나의 기본소득’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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