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아, 도대체 오늘 무슨 결정을 한거니"

신현규 2016. 6. 2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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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이민-EU정서 예상밖 강했다

◆ 브렉시트 대충격 / 런던 현지 르포 7信 ◆

"영국 사람들아. 너희들이 대체 무슨 결정을 한 건 줄 알어?"

24일 새벽 5시(현지시간) 영국 런던 남서부 서비턴 기차역. 첫 열차를 준비하기 위해 객차 문을 열던 역무원이 나지막이 내뱉은 독백이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던 노신사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연발했다.

전날 쏟아진 폭우 때문에 수천 명의 발을 묶었던 워털루 기차역은 아직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듯 고요했다.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은 영문도 모른 채 눈을 떴다.

오전 6시가 되자 국회의사당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샴페인과 함께 '떠나자(Vote Leave)' 팻말을 들고나온 한 무리가 의사당 맞은편 국회광장에 있는 처칠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샴페인을 따라서 한 잔씩 마셨다. 6명이던 이들은 10분여 지나자 30명으로 늘어났다. 아침 조깅을 하던 이들도 그들을 보며 손을 들어 응원의 뜻을 표시했다. 마치 잉글랜드가 축구에서 이겼을 때처럼 훌리건들이 지를 법한 괴성을 질렀고, 영국 국가를 따라 불렀다.

새벽 5시부터 국회의사당 앞에 진을 친 언론사들은 지하철역 앞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지만 스스로도 놀란 모습이 역력했다.

의사당 앞에서 신문가판대를 운영하는 닐 마데시 씨는 "뭐가 일어났는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날지 예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브렉시트를 평생의 숙원사업으로 품고 다녔던 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UKIP) 대표조차 개표 초반에는 "우리가 근소한 차이로 질 것 같다"고 패배를 시인했었다.

그러나 잔류를 지지했던 계층들은 결집력이 약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좌파(Hampstead Liberalism)'식 논리에 물든 노동당의 주장과 경제위기를 거론하며 협박에 가까운 주장을 늘어놓은 보수당의 목소리는 기존 보수·노동당의 양당정치에 환멸을 느껴온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했다.

24일 절반에 가까운 잔류 지지를 끌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 이후 나타났던 패배 측(분리주의자)의 집단행동과 유사한 행동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보수·노동당 등 영국 최대 정당 두 곳이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함에 따라 뿌리 깊은 전통을 유지해온 영국 양당정치 구도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반면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을 비롯한 브렉시트 진영은 사람들의 불안한 감정을 잘 이용하면서 그럴 듯한 논리적 설득력을 곁들여가며 성장했다.

특히 이민 정책에 관해 "아무나 받을 게 아니라 영국에 필요한 사람들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교육받은 젊은 층의 공감을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암리스 우물푸리 씨(24·대학원생·인도 남부 출신)는 "영국에는 엔지니어, 의사, 법률가 등 교육받은 인재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며 "이민자를 선별할 수 있는 권한을 유럽연합(EU)이 아니라 영국이 스스로 갖는 것이 영국의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탈퇴에 한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IT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독일 출신 한 엔지니어도 "EU 탈퇴를 통해 이민자 선별권한을 영국이 갖게끔 하자는 보리스 존슨이나 제임스 다이슨 같은 이들의 주장이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앤토니 브라운 씨(24·대학원생)는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탈퇴 측은 우리의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들을 많이 연출했다"며 "이번 투표는 표면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탈퇴파가 더 많은 것을 가져갔다"고 말했다.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영국이 매주 3억5000만파운드의 지원금을 EU에 바치고 있다'라든지, 'EU에 잔류해 있으면 터키 노동자들이 영국으로 대거 몰려올 것이다'처럼 감정을 자극하는 탈퇴 진영의 문구들은 영국 국민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당장 영국은 브렉시트 결정 이후 사회적 갈등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미 유럽과 찢어지기로 결정한 영국은 스스로도 물리적 분할을 예고하고 있다. 짐 파빗 씨(44·교사)는 "유니언 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국기를 겹쳐 만든 영국 국기)을 구경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브렉시트 결정 이후 EU 잔류를 희망하는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EU 회원국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들의 불안감도 커져가고 있다. 올해 1년 계약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버지니아 스테가니 씨(24)는 "협상까지 2년은 걸린다고 하지만 영국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었던 내 입장에서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런던 인근 워킹 시내 한 초등학교에서 만난 스테파니 이링턴 씨(40·폴란드 출신)는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불안감을 느껴 나가라고 할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경제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커네리워프에서 만난 칼바니 브라운 씨(34·트레이더)는 "브렉시트가 결정되면 최소 7~8년간은 EU의 운명이 흔들리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들도 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브렉시트 저지를 위한 캠페인에서 "EU에서 탈퇴하면 영국이 EU 회원국들과 개별적인 무역협상을 하는 데 최소 10년은 걸린다"며 "그 기간에 영국 경제는 불확실성에 시달리게 된다"고 밝혔었다.

조지 오즈번 재무장관은 브렉시트가 이뤄지면 300억파운드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바 있고, 보수당 의원 57명은 이에 대해 "추경안이 국회로 온다면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다. 영국 재무부는 브렉시트로 인해 국내총생산(GDP)이 최대 6% 줄어들고 실업률이 최대 2.4% 상승할 것이라고 점쳤다.

[런던 = 신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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