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한국의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난징 | 글·사진 심진용 기자 2016. 1. 3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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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당시의 악몽을 전해주는 ‘난징 위안소 옛터 진열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눈물은 언제쯤 마를 수 있을까. 지난 16일 국민대 임시정부 탐방단과 함께 중국 난징(南京) 리지항(利濟巷) 위안소 옛터 진열관을 찾았다. 방문 보름여 전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일 외교장관 합의가 이뤄졌다.

난징 시내 한 도로에서 버스가 섰다. 진열관 건물이 보였다. 건물 한쪽 벽 전체를 한국과 중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 70명의 흑백 사진으로 채웠다. 할머니들은 주름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방문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열관은 지난해 12월1일 개관했다. 일본이 1937년 12월 난징 점령 후 위안소로 쓰던 장소를 난징시에서 그대로 진열관으로 만들었다. 인근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의 분관이다. 진열관은 6개동으로 사진 680여장을 포함한 2000점 이상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첫번째 건물로 들어서면 1층 복도 가운데에 나무 탁자가 놓여 있고 맞은편에 나무 명패 10여개가 걸려 있다. ‘후미코’(文子), ‘마사코’(正子), ‘아키코’(秋子), ‘우타마루’(歌丸) 등 명패마다 검은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다. 일본군 병사와 장교들은 이곳에서 명패에 적힌 이름을 지목하고, 요금을 내고, 끌려온 여성들을 ‘구매’했다.

“오늘은 즐거운 외출일이다. 이시카와(石川)와 둘이 우선 조선 정벌을 하러 갔다. 내 순서는 네번째였다. 도미코, 경상남도, 다음으로 지나를 정벌하러 갔다.” 1938년 한 일본군 병사가 쓴 일기다. 일본군 병사들은 위안부 여성의 국적을 대명사 삼아 불렀고, 성관계를 ‘정벌’이라 표현했다. 당시 병사들이 사용하던 콘돔에는 ‘돌격 일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이렇듯 일그러지고 파괴된 흔적을 진열관 한구석에서 찾을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갔다. 여러 개의 방이 보였다. 숫자가 쓰인 나무판이 방마다 문 위에 붙어 있다. 나무판의 숫자는 위안부 여성들의 방 호수를 가리킨다. ‘19호’ 앞에서 발이 멈췄다.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의 방이다. 한 평 남짓한 방 한쪽 벽면에 작은 화장대가 놓여 있고 낡은 주전자와 찻잔, 거울 등이 전시돼 있다. 다른 쪽 구석에는 다다미 침상이 놓여 있다. 박 할머니는 17세 때 위안부로 끌려와 1939년부터 3년 동안 이곳에서 감금 상태로 생활하며 성노예 역할을 강요당했고, 이후 일본군이 윈난성(雲南省)으로 이동하자 같이 끌려갔다. 그는 이곳에서 ‘우타마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래층 복도 나무 명패에 적힌 바로 그 이름이다. 박 할머니는 2003년 흉가 상태로 방치돼 있던 이곳 위안소 옛 건물을 찾아와 19호가 바로 자신이 있던 곳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말을 듣지 않으면 일본 병사가 군도를 휘둘렀고, 다락방 고문실에서 전라로 체벌을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19호 맞은편 방에는 박 할머니의 나체 사진이 걸려 있다. 일본군들은 그렇게 위안부 여성들을 모욕했다.

박 할머니를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자료를 진열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진열관 6개동 건물 가운데 하나는 따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자료만 모았다. 이 건물 출구에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조선반도 여성들에게 가져다준 상처는 증거가 확실하며 그 피해 역사는 부정할 수 없다”는 한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진열관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눈물 흘리는 할머니 조각이 벽에 걸려 있다. 조각에는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할머니의 눈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축축했다. 조각 아래에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달라’는 글씨와 함께 휴지가 놓여 있다. 휴지를 몇 장 들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한국의 소녀상처럼 할머니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난징 | 글·사진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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