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각서 받던 IMF, 그리스엔 왜 빚 탕감해주려 하나
1997년 우리나라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25%의 고금리, 대기업·금융기관 구조조정 등 가혹한 조건들을 강요했다. 일각에서 "너무한다"는 비판과 함께 재협상론이 나오자 IMF는 당시 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들에게 '자금지원 협상 이행각서'까지 받아냈다. 과거 한국에선 이랬던 IMF가 지난달 26일 그리스의 부채를 30% 탕감해줄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IMF의 분석에 독일 등 다른 유럽 채권국들은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게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과 그리스를 둘러싼 국제정치학적 차이, 사뭇 다른 문화적 배경, IMF의 부도 위기 국가에 대한 대응 전략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그리스가 경제공동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일원이라는 점이다. 그리스 문제를 잘못 처리했다가는 유로존뿐만 아니라 온 유럽이 수십년간 공들여온 유럽연합(EU)이 위태로워진다. 이 경우 그리스를 살리는 비용보다 더 큰 정치적·사회적 비용이 들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 아시아 변방에 있는 고립무원의 채무자였지만, 그리스는 유로존이란 핵우산을 가진 힘 있는 채무자다.
또 다른 차이점은 그리스의 경우 채권단에 IMF외에 EU, ECB(유럽중앙은행), 독일·프랑스 정부 등 여러 주체가 얽혀 있어 채무자의 협상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리스에 지원해준 돈은 ECB(270억유로)가 IMF(210억유로)보다 많다. IMF가 주도적으로 그리스 협상을 몰고 갈 수 없는 상황이다. 1997년 한국은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에서도 일부 지원을 받았지만 IMF로부터 가장 많은 195억달러를 받았다. IMF의 발언권이 셀 수밖에 없었다.
저자세로 일관했던 한국과 달리 그리스 정부는 벼랑끝 전략을 구사하면서 채권단을 괴롭히고 있다. 유럽의 정신적·문화적 고향이라는 점까지 이용해 "그리스 없이 유럽 통합은 없다"며 부채 탕감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은행에서 근무했던 전광우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채무국이 '배 째라'는 식으로 버틸 때까지 버틴 후, 부채를 최대한 탕감받는 것은 사실 아주 일반적인 전략"이라며 "금 모으기 캠페인까지 벌였던 한국은 매우 순진했던 편"이라고 말했다.
IMF는 한국에 강요했던 조건이 너무 가혹했다는 비판을 받고, 전략을 많이 수정했다. IMF 상임이사를 지낸 오종남 전 통계청장은 "IMF라는 의사가 '외환위기'란 병에 걸린 환자를 처음 보고, 무조건 가장 센 약을 먹인 셈"이라고 말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IMF가 구제금융 3개월 만에 처방이 과도했음을 인정했을 정도로 우리에 대한 구조조정은 지나쳤다"며 "이후 IMF는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최대한 각국 경제상황에 맞추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해 나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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