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 대선후보 크루즈 부친은 '허풍선이 혁명가'?

2015. 11. 10. 09:2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쿠바혁명 참가 주장.."그런 사람 기억 못해..특별한 활동 없었다" 증언
라파엘 크루즈(AP=연합뉴스 자료사진)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AP=연합뉴스 자료사진)

1950년대 쿠바혁명 참가 주장…"그런 사람 기억 못해…특별한 활동 없었다" 증언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후보 테드 크루즈(텍사스)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을 거들어온 아버지 라파엘 크루즈(76)가 때아닌 '허풍' 논란에 휩싸였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9일(한국시간) 보도했다.

쿠바 태생인 라파엘 크루즈는 1950년대 혼란스럽던 시기에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에게 저항하는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고 주장하며 아들의 인기에 한몫해온 인물이다.

'목숨을 걸고 독재와 폭정에 저항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는 크루즈 의원의 큰 경쟁력 중 하나였으나 이제 그 진실성이 의심받고 있다.

그는 1957년 바티스타 정권에 체포돼 며칠간 고문받은 이력을 자랑거리로 삼아왔다.

지난 3월 크루즈 의원과 함께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바티스타 정권의 끄나풀이던 사람을 혁명에 합류시키려다가 역공을 당해 붙잡힌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라파엘 크루즈와 당시 같은 조직에 속했던 한 쿠바인은 "그저 권총 한 자루를 소지했기 때문에 체포됐고 그는 그 총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라파엘과 나는 항의 시위에 참가하는 것 외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시위는 폭력적이지 않았다"고도 증언했다.

쿠바 현대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던 '1956년 11월 30일 작전'에 대해서도 라파엘은 혼자만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바티스타 정권에 저항하던 피델 카스트로가 멕시코로 쫓겨났다가 병력을 규합해 보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돌아와 다른 동지들과 세를 합치기로 했던 시점이다.

그는 과거 "1956년 9월부터 카스트로 세력에 합류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지만, 11월 30일 작전에 참가했던 다른 이들은 NYT와 인터뷰에서 "그런 사람은 기억에 없다"고 말했다.

쿠바 혁명의 영웅 중 하나로 칭송받는 프랑크 파이스가 1956년 바티스타 정권에 붙잡혀 처형당하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의 오래된 영웅담이지만, 파이스가 실제로 사망한 것은 이듬해인 1957년이었다.

크루즈 의원은 종종 아버지와 함께 인터뷰를 하며 부친의 '투사'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영해왔다.

복음주의교회 목사로 재직하는 라파엘 역시 "오바마 대통령은 케냐로 돌아가야 한다"는 등 극우 보수파 목소리를 내며 아들의 지지층을 공고히 했기에 그의 신뢰성은 크루즈 의원의 신뢰성과 직결될 수 있다.

크루즈 의원 측은 "60년 전 일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책임하다"며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jk@yna.co.kr

☞ 블랙박스에 찍힌 무단횡단…사망사고 운전자 '무죄'
☞ '담당 피해여성 성폭행' 경찰관 무혐의 처분
☞ '비켜' 경찰관 반말에 순찰차 진행 막은 30대 무죄
☞ 박병호에게 147억원 베팅한 구단은 미네소타
☞ "아이고 성사장~ 반갑구만!"…1988년을 소환한 혜리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