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죽음 슬퍼하는 사하라 남부 주민들, 왜

최민영 기자 2011. 10. 2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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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과도정부군에 의해 생포됐다가 알 수 없는 총격으로 사망한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의 시신은 미스라타의 냉동창고에서 '사진거리'로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각별한 애정과 존경을 가져온 사하라 남부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추도하고 있다고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이 24일 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등 서방세력의 개입에 힘입은 리비아 혁명이 이들의 눈에는 아프리카 내정에 간섭하는 서방의 행위로, 카다피의 죽음은 서방의 개입에 의한 것으로 비쳐진다는 것이다.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 카다피의 이름을 딴 모스크를 관리하는 살림 압둘은 "우리는 카다피의 죽음을 슬퍼하는 '1%'의 사람들"이라며 "카다피는 우간다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카다피는 이곳 모스크 종사자 20명에게 향후 20년간 임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모두 허사가 됐다는 것이다.

카다피의 죽음이 알려진 지난 21일 이곳 모스크에는 약 3만명의 시민이 모여 그를 추도했다고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추도식에서 전 리비아 대사인 셰이크 아미르 무티아바는 카다피가 "영웅으로서 죽음을 맞았다"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이들에게 있어 서방의 개입은 리비아의 원유를 노린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아프리카 최대 인구국이자, 인구 절반이 무슬림인 나이지리아에서도 카다피를 추모하는 분위기다. "카다피는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도자 중 하나였다"고 한 상원의원이 말할 정도다. 소수의 백인 정부에 봉기한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정부 역시 카다피의 짐바브웨 해방 혁명의 지원자로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는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카다피는 아프리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의 혁명을 이어받아 리비아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원유산업을 국유화한 그는 범아랍주의를 주창해왔으나, 세기가 바뀌면서 아랍국가들의 배척을 받자 아프리카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자비와 국영기업을 통해서 아프리카에 모스크와 호텔, 통신회사를 설립하면서 아프리카를 현대화하는 데 일익했다. 더불어 '왕 중의 왕'으로 자칭한 카다피는 아프리카에서 최소 십수건의 쿠데타를 배후 조정한 혐의도 받고 있다.

올해 초 리비아에서 시민혁명이 발발하고 과도정부위원회가 구성됐을 당시 아프리카연합이 이 기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도 카다피의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에서 기인한다. 일각에서는 아프리카국가들이 과도정부군을 진압하기 위해 용병을 파견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현지를 취재한 언론들은 용병들을 실제로 발견한 적은 없다고 전하고 있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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