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들 폭탄선언 '탤런트는 영화출연 안된다'

윤상길 편집국장(대우) 2010. 10. 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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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포트] 영화배우들이 똘똘 뭉쳐 폭탄선언을 했다. "탤런트를 영화에 출연시키지 말라"는 선언이었다. 탤런트의 영화 출연으로 일자리가 줄어들어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영화배우들의 속내가 들어 있는 내용이다. 탤런트는 TV드라마에만 출연하고, 영화에는 영화배우만 출연하자는 노골적 편 가르기인 셈이다. 지금의 이야기가 아니라 1970년대 말에는 그랬다.

영화배우와 탤런트는 구분이 뚜렷한 직업은 아니다. 모두 배우 또는 연기자로 불린다. 연기자는 영화나 연극, TV드라마 따위에서 전문적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전적 의미로 탤런트는 방송에 출연하는 흔히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를 이르고, 영화배우는 영화에 주로 출연하는 연기자를 말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도 영화배우가 탤런트의 영화 출연을 막고 나선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로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는 이 일이 가능했다.

2010년 연예계 흐름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연예인들의 '활동 영역의 비정형성'이다. '크로스 오버'의 전성시대이고, '장르 파괴'가 대세다. 연기자는 영화, TV드라마, 연극, 뮤지컬은 물론이요 개그 프로와 예능 프로에까지 출연 가능한 무대가 있으면 장르의 구분 없이 출연할 수 있다. 가수가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하는 일도 흔한 일이다.

다재다능한 예능인, 전천후 연예인이 환영받는 이 시대에 되돌아보는 1970년대 말의 영화배우에 의한 '탤런트 영화출연 봉쇄 사건'은 자못 흥미롭다.

1979년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속칭 배우협회, 현재 사단법인 한국영화배우협회)의 신성일 위원장은 회원들로부터 난처한 주문을 받고 고민에 쌓였다. 주연급 배우를 포함한 많은 회원들이 "탤런트들 때문에 출연 기회가 줄어들어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며 이에 대한 배우협회 차원의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영화배우의 경제활동은 영화 출연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당시 한국영화의 1년 영화제작편수는 80편. 정부에서 허가한 20개 영화사만이 제작을 할 수 있었고, 1개사가 의무적으로 4편씩을 제작하는 쿼터제 제작 시스템이었다. 배우들은 이 80편을 놓고 적자생존의 경쟁을 펼쳐야 했다.

TV쪽은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았다. 당시의 방송 3사(KBS, MBC, TBS)는 공개채용 형태로 연기자를 뽑아 공채 탤런트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에 출연시켰다. 막 선발된 신인 탤런트는 방송사로부터 월급 형태의 기본 수입을 보장받았고, 보조 출연일망정 그때그때 출연 수당이 지급돼 최소한의 생계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 탤런트들이 영화배우들의 영역인 스크린 나들이가 잦아지면서 영화배우들은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회 분위기도 영화배우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1970년대는 군사적 긴장이 심했던 시기로, 중화학공업을 우선시하던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컬러TV 방송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TV를 포함한 전자제품은 생활필수품이 아닌 일종의 사치품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부가 느닷없이 1980년부터 컬러TV 방송을 예고하고 나선 것이다.

컬러 방송을 주장한 사람은 방송 관계자가 아니었다.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현 한국과학기술원 오명 이사장의 뚝심이 밑바탕이 됐다. 당시 일본과 대만이 신제품 주기를 앞당기며 전자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한국은 컬러TV를 생산하긴 했으나, 해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생산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품과 반도체 등 전자산업 전체가 발전하기 힘들었다고 오명 이사장은 판단한 것이다. 그는 "이미 세계 107개국에서 컬러TV방송이 시행중입니다.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 컬러 TV 방송 허락을 받아냈다.

당시 영화계는 컬러 필름으로 제작된 영화를 통해 흑백TV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우쭐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중의 시선이 시나브로 영화관에서 TV로 옮겨지는 변화에 불안해하였다. 그런데 유일한 생명줄 이었던 컬러 스크린이 안방극장에서 펼쳐진다면 연기자의 무게 축이 TV드라마로 쏠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영화배우들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한 신성일 위원장을 비롯한 배우협회 수뇌부는 배우의 캐스팅 권한을 갖고 있는 영화제작자와 감독들에게 "TV탤런트를 캐스팅하지 말아 달라"고 설득에 나섰다. 면담 등 대화를 통해 때로는 공문을 통한 행정 절차 등의 방법으로 활발하게 영화배우들의 뜻을 전달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영화배우들의 주문에 대부분의 영화감독들은 동조했다. 문제는 자본을 주무르는 제작자에게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제작자는 영화인이 아니라 영화를 상품으로 경제적 이윤을 도모하는 기업가들이다. 수익 창출에 있어 TV탤런트를 기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영화배우들의 하소연은 무시해도 그만이었다.

지역 배급업자(지방장사라고 불렸다)와 극장주들의 반발도 변수였다. 오늘날은 대기업 계열의 영화관과 배급사가 자본을 무기로 제작 전반을 총괄하고 있지만 당시는 지역에 기반을 둔 극장주와 배급업자들이 입도선매(立稻先賣) 형식을 빌려 영화 제작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입도선매란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돈을 받고 파는 행위를 말하는데 영화계에서는 지역 상영권을 담보로 제작 전에 지역별 배급업자들이 제작비를 투자하는 제작 방식을 이른다. 당시 영화의 90% 이상이 입도선매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돈줄을 쥔 지역 배급업자는 캐스팅에 절대적 존재로 군림했다. 자신의 지역에 인기 있는 배우를, 또는 자신과의 친소 관계를 고려해 주연으로 캐스팅할 것을 투자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많은 배우들은 아름아름 경로를 통해 이들에게 접근해 캐스팅 로비를 펼치기도 했다. 이런 배급업자들의 눈에 영화배우들의 '생존투쟁'은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주연급 배우였던 정윤희, 장미희, 김자옥 등 여배우를 비롯해 이영하, 이덕화, 한진희, 강석우 등은 이미 방송국 공채 또는 특채를 통해 TV 드라마에 출연, 전국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제작자와 배급업자들이 이들의 캐스팅을 요구하는데, 영화감독이라고 해서 반대할 명분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배급업자들의 압력에 한동안 영화배우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던 분위기가 '없었던 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작자와 배급업자들의 압력으로 'TV탤런트 영화출연 봉쇄 작전'에 실패한 영화배우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극약 처방을 하기에 이른다. 배우들만으로는 힘이 약하다고 판단한 배우협회 수뇌부는 제작 스태프를 상대로 동참을 호소했다. 촬영, 조명, 음악, 미술, 편집 등 자본을 제외한 제작 전 분야 스태프에게 함께 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때 영화계의 의리는 조직폭력배도 두 손을 들만큼 유별났다. 선후배의 위계질서도 남다르게 튼실했다. 당시 서울 명동 일대를 주름잡았던 조폭 보스들이 조직원들에게 "충무로 사람들(영화인)과는 가능한 부딪치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제작 스태프가 영화배우의 주장에 동조하는 데는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제작 스태프들은 "TV 탤런트가 출연하는 영화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제작 스태프 없이 영화를 제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화배우를 제외한 TV탤런트 연극배우 CF모델 연기지망생 등으로 출연진을 구성한다고 해도 제작 스태프 없이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태프마저 영화계 이외의 분야에서 인력을 충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작자와 배급업자들은 백기를 드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영화배우들의 승리였다. 1979년 여름에 시작된 TV 탤런트의 영화출연 금지 조치는 그 다음해 겨울까지 1년 남짓 계속됐다. TV드라마에 출연하지 않는 영화배우들만이 모든 영화의 주연 자리를 차지했다.

이 봉쇄 작전은 1980년 12월1일 오전 10시 30분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더 이상 대중이 영화를 최고 최상의 미디어로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컬러 방송을 본격 시작하자 TV는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 됐고, 사람들의 옷과 가구까지 바꾸는 등 국민들의 생활문화를 바꿔놓으며, 영화배우들에게도 큰 자극을 주는 계기가 된다.

많은 영화배우들이 앞 다투어 TV드라마로 진출, 활동 폭을 넓혀 갔고, 그 이후로 영화배우와 TV탤런트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논리도 자취를 감춘다.

오늘날 이 구분은 사라졌지만 영화는 여전히 연기자에게 있어서는 '꿈의 구장'이다. 성공한 배우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스크린에서의 인증이 필요하다. 김태희 주연의 영화 '그랑프리'를 관객이 외면하자 "김태희는 TV용 연기자인가?"라며 차가운 반응을 보인 여론이 이를 입증한다.

배우라면 누구나 또 가수 개그맨 아나운서 MC에 이르기까지 대중 예술인들이 영화에 출연하는 요즈음이다. 1970년대 영화배우들의 'TV탤런트 영화출연 봉쇄작전'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절에 보여준 영화인들의 '단결된 힘'은 지금 이 시간에 더 요구된다. 자본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연배우가 바뀌고, 배우가 감독 교체를 요구하고, TV드라마 한 편으로 인기 좀 얻은 신인 연기자가 수십 년 경력의 단역 배우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작금의 제작 현장 모습에서 우리는 그 시절 영화인들의 '단결된 힘'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사진 = TV리포트 DB /(좌부터)이덕화, 김자옥, 장미희(해당 글과 특정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윤상길 편집국장(대우) yoonsk4u@tv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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