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관련서비스

검색

검색폼

<드라마의 제왕> 장항준 작가가 처한 딜레마 본문

뉴스 본문

<드라마의 제왕> 장항준 작가가 처한 딜레마

출처 엔터미디어 | 작성 신주진 | 입력 2012.12.10 15:13 | 수정 2012.12.11 10:55

기사 내용

- 과연 앤서니의 변화는 < 드제 > 를 구할 수 있을까

[엔터미디어=신주진의 멜로홀릭] 많은 사람들이 영화제작과정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제작과정을 다룬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의 허구성 자체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허구적으로 완성된 세계, 매끈하게 이어붙이고 잘 다듬어진 픽션의 세계, 그것은 그들 예술 장르들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어서라거나, 영화나 드라마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 허구적이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럴 듯하게 만들어진 허구적인 것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닌, 그러나 현실과 유사한 또 다른 현실, 가상현실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빠져드는 세계이다.

그래서 드라마에 대해 시청자들이 취하는 태도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변명하지 말고, 엄살 피우지 말고, 징징거리지 말고, 제발 딴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된 잘 만든 작품을 우리에게 보여봐 하는 식. 드라마가 드라마를 만드는 자기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시청자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이다.

드라마가 드라마제작과정을 그리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리도 이렇게 힘들거든, 이해를 요구하고 공감을 구하는 방식, 아니면 정반대로 드라마계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는 내부고발자가 되는 방식이다. < 드라마의 제왕 > (장항준·이지효 극본, 홍성창 연출)은 어느 한쪽으로 포지션을 잡지 못한 채 그 둘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다. 방송계 안팎의 일상과 인간을 디테일하게 그리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계 내부를 인정사정없이 까발리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후자 쪽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영화판에서 드라마판으로 옮겨온 장항준은 '제국', '월드' 등의 이름을 붙여 가며 한국드라마시장의 욕망의 지옥도를 그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큐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데, 드라마판 현실을 그렇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그리는 것은 드라마형식에는 그리 잘 들어맞지 않는다. 드라마는 무엇보다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인간들을 그리다 보면 이 가여운 인간들에 대한 연민에 빠지고 측은지심에 젖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아예 과장과 풍자를 뒤섞어 블랙코미디로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 드라마의 제왕 > 에서는 드라마판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서로 다른 욕망의 갈등들이 드라마틱하게 과장되어 있고, 때로 코믹하게 그려지긴 하지만, 인물과 상황은 어정쩡하게 과장되어 있고 어정쩡하게 코믹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날선 비판과 과감한 풍자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공감과 몰입을 향해 온전히 나아가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장항준은 드라마판의 외부자이자 동시에 내부자로서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감정이입을 허용하지 않는 주인공 앤서니 김(김명민)의 위치가 이 드라마의 딜레마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그는 냉혹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성공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하고 야비한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 어떠한 굴욕도 감내한다. 군림하는 자의 오만함과 저 밑바닥에 떨어진 자의 비굴함을 동시에 가진 주인공을 지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그의 밑에서 그의 방식을 그대로 배운 라이벌 오진완(정만식)이나 '제국'의 회장(박근형)과 정확히 동일한 인물이다. 그는 그들보다 결코 덜 악하지 않다.
문제의 < 경성의 아침 > 을 쓴 신인작가 이고은(정려원)을 무참히 배신하면서 그는 당당히 선언한다.

고은 : 불행하지는 않아. 너처럼 세상을 더럽히면서 살진 않았으니까.
앤서니 : 한 가지 모르는 게 있군. 세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더러워져 있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짓밟는 자가 승리하고 힘 있는 자가 패배자들을 지배하는 게 세상이야. 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승리할 거구.
고은 : 너 지옥에 떨어질 거야.
앤서니 : 모르는 게 또 하나 있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지옥이야.

그는 자신이 짓밟히고 배신당한 방식으로 남들을 짓밟고 배신한다. 이 드라마의 중심 테마인 앤서니의 흥망성쇠는 생존투쟁으로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어가는 이 지옥 같은 세계의 논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드라마제작자로서의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성도, 인간관계도, 심지어 사랑도. 그가 '제국'회장이 제안한 5억을 거부한 것처럼, 어쩌면 그는 돈마저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 경성의 아침 > 의 제작을 위해, 그 성공을 위해. 고은이 자신을 두 번이나 배신한 앤서니를 끝까지 믿고 따르는 것은 그녀가 그의 그런 맹목적 열정을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집단적 행위, 함께 모여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주는 힘이다. 내부에 엄청난 투쟁과 싸움이 있지만, 또한 한단계한단계가 타협과 조율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이들이 갈등하고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화학작용들, 불규칙하고 불안정하게, 그럼에도 하나씩하나씩 이루어가는 창조의 과정은 사람들을 바꾸어 놓는다. 주연배우 강현민(최시원)을 바꾸어 놓고, 고은을 성장시키며, 무엇보다 앤서니를 변화시킨다. "믿어. 세상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나지만, 내 자신조차 믿지 않을 때가 있는 나지만, 그런 내가 너, 믿는다구." 항상 위악을 부리던 그가 드디어 고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드라마 초반, 감정이입도 공감도 하기 어려운 인물에서 조금씩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가는 앤서니로 인해 < 드라마의 제왕 > 은 어떤 균형점을 잡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드라마판의 지독한 이전투구를 보여주면서도 인간들의 욕망의 맹점과 균열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연 앤서니의 변화는 딜레마에 처한 앤서니 자신, 그리고 < 드라마의 제왕 > 을 구해낼 수 있을까.

칼럼니스트 신주진 joojin913@entermedia.co.kr

[사진=SBS]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