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국말, 니콜 키드먼이 알아듣더라"

2012. 5. 2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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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스토커' 후반작업 박찬욱 감독

"니콜 키드먼은 연기기술자, 미아 바시코프스카는 애늙은이"

할리우드 진출작 1년여 작업엄마·딸·삼촌 삼각관계 담아매슈 구드 악마적 매력 발산

"총싸움은 없는 심리스릴러영화 나오면 칭찬받고 싶다"

"1년 넘게 모국어를 주머니에 넣어둔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박찬욱(49) 감독은 미국에서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를 찍었다. 그는 할리우드 심장에 다가간 이 영화를 "총싸움 없는 스릴러"라 표현했고, "영화사상 (시공을 넘나드는) 교차편집이 가장 길고 많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알려왔다.

박찬욱과 할리우드. 두 브랜드가 만난 <스토커>는 <블랙 스완> <슬럼독 밀리어네어> <소년은 울지 않는다> 등을 만든 폭스서치라이트가 투자·배급하고, 할리우드 스타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다. 순제작비 1200만달러(약 142억원). 한국에선 애칭 '석호필'로도 불린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웬트워스 밀러가 각본 초고를 썼다. 교통사고로 죽은 아빠의 장례식에 삼촌(매튜 구드)이 나타나면서, 엄마(니콜 키드먼), 딸(미아 와시코스카), 삼촌이 외딴 저택에서 펼치는 삼각관계를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다. 그에겐 <박쥐>(2009) 이후 3년 만의 장편 신작이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막판 후반작업으로 바쁜 박 감독과 이메일 인터뷰로 작품과 할리우드 경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세명의 천재(음악가)'와 영화음악 작업을 하는 요즘, "축복이 아닐 수 없다"며 자신의 근황부터 전했다.

-후반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요?

"편집은 진작 끝냈고 색보정과 음악에 매달려 있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함께 연주하는 피아노곡 두 개는 (작곡가) 필립 글라스 선생께서 만들어 줬고, 배경음악은 클린트 맨셀이 만드는 중입니다. 맨셀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모든 영화음악을 만든 영국 사내죠. 제가 오랫동안 '현대의 모차르트'로 숭배해온 글라스 선생님과, 영화 <파이>의 오에스티(OST)를 처음 들은 이래 언제나 제 작곡가 후보 명단의 최상층을 점유한 맨셀, 게다가 영화 마지막에 나올 주제가는 젊은 싱어송라이터가 만들고 있습니다. 에밀리 웰스라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아가씨인데 들어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이 세 천재들과 음악 아이디어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 아닐 수 없죠.

6월 초에 런던 '에어 스튜디오'에서 음악 녹음, 다시 엘에이로 돌아와 모든 소리를 다 합쳐 믹싱 등을 마치면 7월 초가 되겠죠. 늦어져도 7월 중순엔 영화가 완성될 겁니다. 개봉일은 제작사에서 이리저리 계산 중이죠. 올해 9월설과 내년 1월설이 있습니다."

-<스토커>(Stoker)의 의미는 뭔가요?

"'불 지피는 이'인데, 영화를 보면 왜 어울리는 단어인지 이해할 겁니다. 주인공 가족의 성(姓)이기도 하고요. 초고 작가 웬트워스 밀러가 '드라큘라'를 쓴 소설가 브람 스토커에서 가져다 쓴 겁니다. 스토커(stalker·남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람)란 오해를 막기 위해 한글 표기는 '스토우커'로 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아르(R)등급(17살 미만은 성인을 동반해야 관람 가능)을 받아, 국내에선 '복수·파괴성·섹스코드가 얼마나 심하기에…' 하고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18살 관람가 등급인데, (그런) 말 나올 게 뭐 있습니까. 제 영화가 그보다 낮은 연령등급을 받았다면 몰라도. 제 영화에서 늘 봐온 수준의 폭력과 섹스일 뿐입니다, 즉 별 거 아니란 얘기죠.

(영화 배경인 외딴 저택은) 교육을 잘 받고 유복한 가족이 자기들끼리 폐쇄적으로 사는 곳입니다. 거의 섬이죠. 이 세팅만으로도 벌써 뭔가 비뚤어진 호기심이 생기지 않나요? 저만 그런가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향을 받은 시나리오라고 하던데요.

"원작자가 히치콕의 영화 <의혹의 그림자>를 많이 의식하고 썼지만, 저는 <의혹의 그림자>의 그림자를 각색이나 연출에서 좀 덜어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더하진 않았습니다. 흉내 영화를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요. 홍보부서에선 '심리 스릴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멋진 말이지만 사실은 '스릴러는 스릴러인데 총싸움은 없는 스릴러'라는 뜻입니다."

-앤트워스 밀러의 원작에서 각색을 통해 어떤 부분을 더 보강했나요?

"소녀의 성장담으로 이야기를 재규정했습니다. <스토커>는 어른이 되는 과정을 다루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물론 꽤나 비틀린 성장 과정이긴 하지만요. 결국 영화의 시작과 끝이 바뀌었죠.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엄마의 비중을 좀 키우고 성격을 수정했습니다. 좀 더 복잡한 인물이 됐죠. 시제와 장소를 훨씬 빈번히 바꿔, 교차진행이 영화의 두드러진 형식이 되도록 했습니다. 영화사상 교차편집이 가장 길고, 가장 많은 작품으로 기록되기를 바라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봐야 언젠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더한 영화를 이미 만들었겠지만."

-어떻게 할리우드와 작업하게 된 건가요?

"제작사 '스콧 프리'에선 제가 남의 각본으론 안 만드는 감독인 줄 알고 연락할 생각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제 매니저의 제안을 받고 용기를 냈다고 하네요. 투자·배급사인 폭스서치라이트의 대표는 제가 <박쥐>를 가지고 프랑스 칸영화제에 갔을 때 만난 적이 있어요. 함께 일할 기회를 만들어보자고 약속했죠. 아마 그래서 '스콧 프리'에서 제 이름을 내밀었을 때 금방 승인했나 봅니다."

-왜 박찬욱을 할리우드 대안 감독으로 선택했을까요?

"제가 '할리우드의 대안'씩이나 되겠습니까? 제가 만들어온 작품들이 그들 보기에 재미있었고 그들이 보낸 각본이 저 보기에 쓸 만했다는 것, 이게 다입니다."

-니콜 키드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인 에어>의 여주인공 미아 와시코스카, "악마적 매력을 발산하는 걸 보면 깜짝 놀랄 것"이라고 칭찬한 매튜 구드는 어떤 배우이던가요?

"니콜은 숙련된 연기 기술자이죠. 배우·스태프 통틀어 통역이 제 말을 옮기기도 전에 혼자서 알아들어버리는 일이 가장 잦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몰래 배운 게 아니냐는 말을 꽤 들었죠. 제가 무슨 대담한 제안을 내놓아도 당황하거나 곤란해 하는 법이 없어요. 니콜과 일하다 보면, 저의 가장 와일드한 상상도 그저 전에 몇 번이고 들어본 적 있는 시시한 상투형에 불과하다는 생각조차 들어 우울해지곤 합니다.

미아는 애늙은이에요.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 한 마디 없고,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할 일만 하죠. 아주 심지가 굳은 아가씨입니다. 이 모든 게 그녀를 '요즘 미국' 아가씨 같지 않아 보이게 만들어요. (물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기도 하지만.) 뭔가 옛날 사람, 어디 딴 세상 사람 느낌을 줘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인 에어> 같은 영화로 유명해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죠. 고동색으로 머리 색깔까지 바꾸고 출연하는 <스토커>에서도 미아의 그런 면이 잘 드러납니다. 중세적이고 동양적이기까지 해보이죠.

매튜는 지독하게 영국인입니다. 지적이고 재치 넘치고 예절이 바르죠. 그런데 그 지성은 가끔 균형을 잃어 극단으로 치닫는가 하면, 재치는 종종 냉소에 가까워집니다. 그의 예절은 자학과 구별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매력이죠. 완벽한 겉보기완 달리 인간의 어두운 면, 슬픔과 아픔을 아는 배우입니다. 큰 배우가 될 조건 중 으뜸을 갖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 배우들과 이견이 생겼을 때 조율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배우들과는 첫 촬영 전에 토론과 (각본) 독회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미국에선, 특히 스타들로선 흔한 일이 아니라더군요. 하지만 우겨서 했습니다. 해보더니 다들 좋아했어요. 그 덕에 현장에서 의견이 충돌할 일이 없었죠. 미리 다툴 거 다 다퉈뒀으니까요.

촬영 기간 중에도 미아와 매튜와는 자주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셨습니다. 니콜은 갓난아기의 엄마라 가욋시간을 내기 힘들었고요. 촬영 때는 배우이고, 스태프이고 각자 일에 바빠서, 감독 말에 이견을 내세울 짬이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일정 지연시키는 주범으로 눈총받기 딱 좋죠. 이견 주장하는 사람 좋아하는 감독으로서 그 점이 좀 아쉬웠습니다."

-이번 영화가 매일 12시간씩, 40회차 정도로 촬영이 빠르게 진행됐다고 들었습니다. 할리우드 시스템과 한국영화 시스템이 다른 대표적 특징은 무엇인가요?

"프리 프로덕션, 즉 촬영 준비 기간을 충실히 오래 가지는 건 확실히 한국영화의 강점입니다. 촬영도 많은 횟수를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반면 미국은 후반작업을 오래 해서 좋아요.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뭐든지 다 오래 하는 게 최고냐?"라고 물으신다면 감독으로서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작자로선 어떠냐고 물으신다면 "적당히 하는 게 좋겠죠…"라고 적당히 얼버무려야겠죠."

-할리우드 경험 중에서 특히 어떤 부분이 이후 한국에서 영화작업을 할 때 가장 큰 자극과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는지요?

"우리 영화는 우리의 생태계에 맞춰 진화하는 중입니다, 거기에 대고, "'미쿡'에서는 이러지 않아!"를 외쳐봐야 무슨 소용일까요? 저는 미국에서 한국인 스태프들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첫째, 각자 알아서 잘 하고, 둘째, 변화하는 상황에 순발력 있게 잘 대처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미국인들은 확실히 체계를 잘 이뤄놓았고 매뉴얼을 정확히 갖춰뒀더군요. 개인 역량 차이에 따른 실수나 의사전달의 착오 따위를 예방하도록 말이죠. 거쳐야 할 과정은 반드시 거치게 하고, 뭐든지 기록으로 남기고, 책임 소재도 분명하고요. 뭐가 더 좋은지 모르겠어요, 장단점이 워낙 뚜렷하니까요. 미국에 한국 스태프들을 몽땅 끌고 오는 게 어려운 것처럼 한국에 '미제 매뉴얼'을 강제하기도 힘듭니다. 듣자 하니, 김지운 감독이 미국 영화에 한국식 현장편집 개념을 도입해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는데 저는 그러지도 못했고…. 일개 미천한 감독이 커다란 시스템과 오랜 관습을 어찌 바꾸겠습니까. 저는 그저 미국 오면 미국식으로, 한국 가면 한국식으로 그렇게 찍을까 합니다."

-<올드보이>에서 함께 했던 정정훈 촬영감독과 이번에 같이 작업을 했던데요.

"아이고, 영어도 못하지 제작환경도 낯설지 처자식은 두고 왔지 냉면도 못 먹지, 힘들어서 어디 영화 찍겠습니까? 한국 사람, 친한 사람 하나 곁에 둬야지요.

사실은 그 말고도 (통역 겸) 어소시에이트 프로듀서 정원조, (4명으로 이뤄진)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들인 '콘티 브라더스', VFX(visual effects·시각 효과) 수퍼바이저 이전형 등, 늘 저와 함께 일해온 한국인 스태프들이 몇 참여했습니다."

-김지운 감독도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를 연출해 후반작업 중인데요. 할리우드가 한국영화의 어떤 점에 관심이 있는 건가요?

"미국 영화인들을 죄다 만난 건 아니지만, 김지운과 봉준호 감독은 잘 알고 존경하는 것 같더군요. 배우 이병헌씨를 좋아하는 이도 많고요. 미국 상업영화들이 잘 다루지 않는 영역, 그것도 여간해서는 들어가기 꺼려지는 지점까지 악착같이 가보려고 하는 '어떤' 한국영화들의 지독한 노력, 그리고 뜻밖의 순간에 시적인 감흥을 찾아내는 능력 따위에 감응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이 영화 제작자로서 <설국열차>의 어떤 점을 기대하나요?

"첫째, 봉준호의 액션! 봉 감독 영화 중 가장 스타일리시한 작품이 나올 듯합니다. 기차 꼬리칸에서 봉기한 최하층민 혁명군이 독재자가 탑승한 기관차까지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쾌감이 굉장합니다. 둘째, 독창적인 에스에프 영화. 할리우드가 시즌마다 쏟아내는 이 장르의 영화 중에 그럴 듯한 물건이 몇이나 됩니까? 특히 어느 정도 이상의 제작비가 투자되고 액션 장면을 잔뜩 가진 영화 중에요. 셋째, 국제 프로젝트입니다. 프랑스 원작, 한국 감독, 미국·영국·일본·한국 등의 배우 캐스팅과 스태프…. 이 아니 흥미진진한 구성입니까? 송강호와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가 한 화면에 나온다니까요."

-할리우드 데뷔작 개봉을 앞둔 기분은 어떤가요?

"변변한 평양식 냉면 한 그릇 못 얻어먹으면서 미국에서 일 년 넘게 살았습니다. 아름답고 똑똑한 한국 여배우들 하나 못 만나고 지낸 세월이었습니다. 모국어를 주머니에 넣어둔 시간이었습니다. 영화가 나오면 칭찬도 받고 돈도 벌고 해서, 그렇게 중요한 것들을 희생해가며 일한 보람을 찾아야 할 텐데, 참 걱정입니다. 행운을 빌어주세요."

박 감독은 지금 할리우드와 손잡은 영화를 세계시장에 내놓는 또다른 도전 앞에 섰다. 그는 도전을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노감독'의 고언을 마지막으로 들려줬다. 왜 기회가 오지 않느냐고 불평하며 주저앉아 있는 청춘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친애하는 하모니 코린 감독이, 자기 멘토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제게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불평하는 문화에 길들여지지 마라'. 천만 달러 있으면 천만 달러짜리 영화를 찍고 만 달러 있으면 만 달러짜리 영화를 찍고, 장편이고 단편이고 픽션이고 다큐멘터리이고 막 찍어대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아마존이고 사하라고 다 가는 그 노대가의 말씀입니다. 돈이 없어서, 연줄이 없어서, 운이 없어서, 유행을 안 좇아서, 영화계가 썩어빠져서 영화 만들 기회가 안 온다고 불평만 하며 허송했던 제 젊은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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