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먹소', 이게 여성 아이돌에게 방송국이 할 짓인가

이승한 입력 2016. 6. 3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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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잘먹소’ 제작진에게 방송권력 통한 인권유린을 허락했나

제20강. 포르노 [porno]

[명사] [영]
1. 인간의 성적 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성욕을 자극하는 책, 영화, 사진, 그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2. 위의 정의에서 ‘성적’이란 단어를 ‘취식’으로, ‘성욕’을 ‘식욕’으로 바꾸면 최근 첫 방송을 시작한 JTBC <잘 먹는 소녀들>의 정확한 장르 규정이 되겠습니다.

[엔터미디어=이승한의 TV키워드사전] 젊은 여자가 식사를 하는 중이다. 3,40대 남자들이 모여 앉아 식사하는 광경을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남자가 연신 “옳지! 옳지!”를 외친다. 함께 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남이 식사하는 광경을 두고 다른 이에게 의견을 묻는다. “OOO 씨, XXX 씨가 족발 먹는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주 건강한 방식입니다. 채소의 섬유질과 족발의 단백질이….” 질문하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자신들의 품평이 식사 중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큰 고민이 없다.

심지어 이 광경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있어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인터넷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모두 투표를 통해 이 사람이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를 평가하고 표를 행사한다.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방금 막 배부르게 한 끼를 먹었음에도 잠시 후 또 식사를 해야 한다. 여전히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어필해가면서.

인터넷 방송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아니다. 명색이 ‘제4의 지상파’를 꿈꾸는 종합편성채널 JTBC가 새로 선보인 신규 예능 <잘 먹는 소녀들> 이야기다. 레드벨벳 슬기, 트와이스 다현, 쯔위, 구구단 강미나, 오마이걸 지호, 에이핑크 남주, 시크릿 전효성, 나인뮤지스 경리까지 여덟 명의 걸그룹 멤버들이 각자 좋아하는 야식을 시켜서는, 9:1 정도의 비율로 남성 성비가 압도적인 방청객과 연예인 평가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를 한다. 한 번에 두 명씩 식사를 하고, MC인 김숙, 조세호, 양세형은 그걸 무슨 스포츠 중계처럼 묘사하고 코멘트한다.

MC들만 코멘트를 하는 게 아니다. “아무개가 OO 먹을 줄 아네.” 마치 어떤 메뉴는 이러이러한 식으로 먹어야 한다는 정해진 법이라도 있다는 듯, 새카만 후배들의 식사에 감탄을 하고 박수를 치며 품평을 하는 연예인 평가단의 멘트도 쉴 틈 없이 치고 들어온다. 한번 먹을 때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10분, 가뜩이나 소화도 안 되게 옆에서 이래저래 품평을 하는 것도 불편해 죽겠는데, 심지어 이게 경쟁이라서 어떻게든 맛있어 보이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인터넷 실황 중계로 지켜보는 이들로부터 표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이기면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서 또 밥을 먹어야 한다.

인터넷 방송에서 먼저 불었던 먹방 열풍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만 해도 TV는 비교적 점잖은 방식을 택하곤 했다. 소문난 맛집을 찾아가 소개한다거나, 스타가 즐겨 가는 맛집을 찾아가 대표 메뉴를 맛본다거나, 쿡방과 결합해서 ‘이렇게 조리하면 이렇게 맛있습니다’라는 걸 보여준다거나. TV는 어떤 식으로든 먹방을 보여줄 명분을 부여하지 않으면 불안해 했다. 인터넷에서 건너온 먹방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포르노와 그 메커니즘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의 가장 원초적이고 내밀한 욕망을 타인이 충족하고 있는 광경을 HD로 지켜보며 욕망을 대리만족하는 것, 실제보다 더 윤기가 흐르고 매력적으로 찍힌 대상을 소비하는 모습을 다각도로 잡아 전시하고, 환희에 찬 미소를 클로즈업으로 잡아 지켜보는 이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과정 모두가 사실 고스란히 포르노의 메커니즘이다.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해선 더 이상 자극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에 그 양을 한도 끝도 없이 늘린다거나, 더 극단적인 형식을 택하는 식으로 진화해 온 것 또한 먹방과 포르노가 공유하는 점이다.

특히나 먹방을 진행하는 여성 BJ들의 경우 적잖은 수가 외모에 신경 쓰고 날씬한 몸매를 강조해 온 것이야말로 – BJ들 본인이 인지하고 의도했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 포르노의 오래된 클리셰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정숙하고 청순해 보이는 외모와 옷차림”을 한 여성이 사실 알고 보니 잠자리에서 엄청나게 적극적이더라는 식의 판타지는 전통적인 포르노 코드 중 하나였는데, 이는 여성에게 늘 청순해 보일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나와의 잠자리에서는 요부가 될 것”을 바라는 남성 본위의 판타지다.

여성은 그 외양에 따라 걸맞은 행동양식이 정해져 있음을 자의적으로 규정함(“청순해 보이는 외모니까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울 것이야”)으로써 상대의 주체성을 거세하고, 성녀와 요부라는 두 가지 상반된 코드 모두 오로지 주체인 ‘나’의 욕망을 위해서만 작동하기를 바라는 판타지. 이것을 먹방의 문법으로 다시 옮겨 쓰면 “겉보기엔 너무 말라서 이슬이나 먹을 것 같고 밥을 줘도 깨작깨작 먹을 것 같은 몸매를 유지하는데, 먹을 걸 앞에 놓으면 내 예상을 깨고 너무 복스럽게 잘 먹는 여자”라는 코드가 된다.

이런 ‘날씬한 여성의 먹방’ 코드가 차츰차츰 TV로 넘어오는 전조가 보였던 건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MBC every1의 <주간 아이돌>에서 퀴즈를 맞춘 아이돌들에게 한우를 구워준다거나, MBC <우리들의 일밤 &#8211; 진짜 사나이> 여성 특집 때마다 이번엔 누가 더 열심히 허기를 달래며 배식을 먹을까가 화제가 된다거나. 여성 아이돌들에게 살인적인 다이어트와 몸매 유지를 요구하면서 그 기준에 누락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얼굴 평가와 몸매 평가를 서슴지 않던 기존 미디어가, 그런 엄청난 체중관리를 함과 동시에 먹는 것도 잘 먹기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먹는 것을 주저하거나 잘 먹지 않는 이들을 향해 ‘내숭 떤다’는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

<아이즈>의 위근우 기자가 [걸 그룹 ‘먹방’을 마음 편히 볼 수 없게 된 이유](2015년 8월 20일, 아이즈)라는 칼럼을 통해 날카롭게 지적했던 것처럼, “어떤 대중이 걸 그룹에게 원하는 인간적인 모습은 한 인간으로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기에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군말 없이 수행하는 모습”에 가깝다. 날씬하면서 동시에 잘 먹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모두 시선의 주인인 ‘나’의 욕망에 맞춰 전시하고 유지해 주길 바라는 욕망, 상대가 주체성을 포기하고 나만을 위해 움직여주길 바라는 그 욕망은 더도 덜도 아닌 포르노의 욕망이다.

이런 맥락 위에서 등장한 <잘 먹는 소녀들>은 그 포르노성이 극대화된 쇼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진행된 생방송에서 출연자들은 쉴 틈 없이 먹고 또 먹었다. 출연자들은 짜장면 면발이 퉁퉁 불어서 척 봐도 맛있게 먹기 어려운 상태인 게 뻔해도 마치 천상의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리액션을 연출해야 하고, 그 모습을 수많은 남자 방청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지켜보는 스튜디오 한 가운데에서 전시해야 했다.

말하자면 ‘맛있게, 먹고 싶은 만큼 식사를 하며 행복해 하는 나’를 대중 앞에서 연기한 셈인데, 카메라가 잡고 있지 않는 순간 참가자들이 연기를 내려놓고 힘겨워 하는 모습도 포착이 됐다. 급기야 다음 회차 예고에는 평소 섹시콘셉트를 내세웠던 전효성과 경리가 ‘섹시하게 먹는 모습’을 두고 자웅을 겨루는 장면까지 등장했다. 뭘 어쩌자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잘 먹는 소녀들>의 성치경 CP 이하 프로그램 제작진 전원께, 포르노 업계에 인상적인 이력서를 제출하신 것에 축하 말씀을 드린다. 방송에 조금이라도 노출되는 게 급한 여자 아이돌들을 데려다가 “양껏 먹게 해줄게, 너희도 좋지?”라는 말로 면피하며 착취해서 전시하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만약 그렇게 전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여전히 방송국 시스템 안에서 범 대중을 상대로 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면, 당신들 모두 번지수가 심각하게 틀렸다. 당신들이 만든 건 그냥 포르노다. 그것도 개중에서 무척이나 인권유린적인.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외부필자의 칼럼은 DAUM 연예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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