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시선
아이즈 ize 글 김봉석, 김현민
내부와 외부. 공포영화에서 외부의 악은 대개 이방인에서 시작한다. 낯선 자가 들어온다. 그가 악을 퍼트리고 있다. 뱀파이어나 외계인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외부의 침입자들. [곡성]의 피해자들은 주변 사람을 죽인다. 때로는 가족, 가장 사랑했던 이들을 욕하고 때리고 처참하게 죽인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무엇인가가 그들을 감염시켰을 것이라고 믿는다. 쉬운 선택은 독버섯 때문이고, 불합리하고 초자연적인 해석은 악마 또는 귀신이다. [곡성]은 공포영화다.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온순하던 시골 사람들이 악귀가 되어 서로를 해친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인 [황해]로 돌아가면, 연변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조선족들이 서로 싸운다. 한국 내부 폭력조직의 다툼이 결국은 외부의 치명적인 악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묘하다. 구남(하정우)과 면가(김윤석)는 한국 내부의 어떤 이들보다 생생하고 활력이 넘친다. 면가 일행이 휘황한 공항의 입국장을 들어올 때 그들은 모든 풍경을 압도한다. 한국이라는 도시, 번드르르하게 다듬어진 세상의 모든 질서를 거부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외부의 그들은 내부의 모든 것을 파괴할 힘이 있다. 애초에 이 도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상누각처럼 부실하고 뒤틀려 있다.
[곡성]은 평화롭고 고요하던 마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괴질의 원인을 찾아가는 초반은 피식거리는 유머와 함께 차곡차곡 의문들을 쌓아간다. 종구라는 인물이 왜 결국 믿음을 저버릴 수밖에 없는지 아니 애초에 종구의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종구는 일본인과 무당 일광(황정민)과 목격자인 여인(천우희)을 이어주는 인물 즉 주인공이다. 그의 눈을 통해서 관객은 그들을 만나고, 보게 되고,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일종의 허상이었음을 마지막 순간에서야 알게 된다. 종구는 모든 미망에 현혹되고,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배신하고, 마침내 파국을 맞는 비극적 인물이다.
중반에 접어들면 [곡성]은 초반의 웃음을 싹 지워버리고, 일광의 굿 장면처럼 가슴이 쿵쾅거리면서도 뭔가 어긋난 채로 마구 달려간다. 나홍진은 애초에 설명을 정확하게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각자의 말은, 그저 서로를 현혹시키는 허언일 뿐이다. 일본인도, 일광도, 여인도 등장하는 순간 이전의 말과 행동을 뒤집어버리면서 종구를 흔들어놓는다. 나아가 관객을.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허언들이 시선을 집중시킨다. 장면마다 나홍진 특유의 생동감이 불끈거린다. 가짜이지만 가장 진짜 같은 상황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곡성]은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들려줄 의향이 없어 보인다. 나홍진의 전작들은 분명한 주인공과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곡성]에는 없다. 일본인과 일광과 여인은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물고 물린다. 종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 헤매는 사이비 신도일 뿐이다. 중반 이후 종구의 추적과 발악은 모든 것을 끌어간다. 광기다. 광기가 모든 것을 사로잡는다. 생명력 같은 그럴듯한 말을 붙이는 것은 사치다. 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종구는 무엇이든 한다. 살기 위해 죽이고, 죽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비틀고 파괴한다.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떨어져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곡성]은 보여준다. 인간은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절실한 이유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가짜의 기적을 바라면서까지.
마지막까지도 알 수가 없다. 그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그녀가 원한 것은 종구의 파멸일까? 아니면 악마의 소행을 막기 위해 시험을 내리는 것일까? [곡성]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지 않다. 외부에서 온 악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애초에 구원의 실마리가 없다. [곡성]은 대단히 불친절한 영화다. 관객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킬 생각은 애초에 없고 뒤틀린 피의 향연을 지시등 삼아 따라오라고만 내던진다. 그 오만함을 마지막 순간까지 관철시킨다는 점에서 [곡성]은 대단한 영화이고, 나홍진은 거장이라는 말을 이미 들을 만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오만함을 좋아한다. 전반부에서 장르적 관습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 후에는 제멋대로 장면들을 붙여 나간다. 튀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잘한 구멍들을 너끈히 메워주는 힘이 있다. 인간을 바닥까지 끌어내려 아우성치는 모습을 끝내 보여주고 마는 에너지. 저건 뭐지, 하면서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이 [곡성]에는 있다.
악마? 그래 좋다. 그가 악마라고 치자. 그렇다면 여인은 누구인가. 악마를 물리치려는 원혼? [곡성]은 그런 구분에 크게 관심이 없다. 어차피 종구는 현혹되었다. 그들이 누구이건, 어떤 구원을 내리건, 종구는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떤 때는 터무니없이 허황된 이유와 비전에 쉽게도 넘어가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종구는 뒤돌아서 버린다. 그게 인간이다. 귀신들이 아우성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아우성을 친다. 그러면서 서로를 죽이고, 죽게 만든다. 작은 마을이 아니라 세상 전체다. 나홍진은 다시 한 번 대단한 영화를 만들었다. 걸작이라고 부르기에는 성긴 구석이 꽤 보이지만, 걸작이 아니라고 부인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고 몇몇 장면들이 결코 눈에서,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답할 것이다. 이 영화는 걸작이 맞다고. 하지만 뒤틀려 있다고.
[곡성]에는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선명한 명제가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문자로 각인되는 성경 구절(누가복음 24장 37~39절). 의심에 사로잡혀 실체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허약한 인간 인식이 전제된다. 이 구절은 잊을 만하면 “중한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캐고 지랄이야”(효진),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일본인) 등 인물들의 설명적 대사로 반복 변주되고, 급기야 영화 말미에서 악마의 속삭임으로 정확히 물구나무 세워진다. 물론 발화 상황마다 뉘앙스는 차별적이다. 특히 악마의 조롱을 통해 전복될 때의 강력한 각성 효과가 [곡성]의 진짜 의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이 [곡성]을 지탱하는 불변의 언표 대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나는 의심하고 현혹된다. 고로 존재한다’가 [곡성]의 공리인 셈이다. 영화가 장장 156분을 들여 외치는 이 구호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곡성]에서 이것은 특별한 증명 없이 자명한 진리로 인정된다는 사실, 그러니까 인간은 현혹되는 존재라는 스스로의 주장만큼은 결코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만큼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은 이 영화의 태도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곡성]은 관객을 일차원적으로 현혹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 영화가 일본인(쿠니무라 준)을 다루는 방식을 보자. 마을에 기이한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영화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떠도는 일본인에 대한 소문을 직접적인 이미지로 구체화해 보여준다.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우고, 사건 현장에서 종구(곽도원)와 눈이 마주치고, 기괴한 주술 의례를 반복하고, 무당 일광(황정민)에게 범인으로 지목당하는 등.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간 거의 모든 정황이 일본인을 악의 축으로 몰아간다. 그런데 종구와 우리가 그것을 믿게 될 때쯤 급작스럽게 이것을 폐기한다. 돌연 카메라는 그간의 관찰적 시선을 거두고 일본인의 인간적인 면모와 감정에 밀착한다. 시장에서 닭값을 흥정하는 모습, 종구 일행으로부터 숨기 위해 바위에 아스라이 매달렸을 때의 몸짓, 서글픈 선율과 함께 정면에서 포착되는 울기 직전의 표정, 급기야 ‘곡성’을 토하는 음성 등을 배치한다. 그때까지 “그 양반 사람 아니여, 귀신이여”로 진술되던 일본인은 ‘영’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트릭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의미의 무의미화를 위해서라면 [곡성]은 거침없다. 우리의 추론은 죄다 헛발질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전략 자체를 문제시할 수는 없다. 인과를 비틀어 반전을 도모하는 것은 추리서사의 오래된 관습이다. 문제는 이 방식이 앞서 확인했다시피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필요에 따라 작위적이 된다는 데 있다. 나는 어느 순간까지는 이 영화가 제안하는 퍼즐게임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며 따라갔고, 그것이 공연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도 기꺼이 [곡성]이 쏟아내는 화면에 주목했다. 이 영화가 인간 인식의 태생적 허무라는 철학적 깨달음을 생생히 체화해내고, 그것이 영화 밖 세상과 유효적절하게 공명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혼란을 차곡하게 쌓아 자신의 명제를 자생적으로 입체화시키는 방식 대신 캐릭터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전지적 손길을 개입시켜서라도 상황을 자주 비튼다. 비틀기를 위한 비틀기. [곡성]의 전략은 기만적이다.
한편, [곡성]의 몰입도는 원인을 흐릿하게 지우는 서사 전략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결여는 숙고의 대상이 아니다.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감각이다. 종구가 첫 사건 현장에 출동했을 때 낮게 깔린 몽환적인 음악은 사태에 모호한 뉘앙스를 더한다. 현실과 꿈, 소문, 환상의 경계를 교란시키는 점프 컷으로 이 모호함은 지속된다. 나아가 우리는 초반부터 날 짐승을 파먹는 붉은 눈의 일본인과 마주하고, 벼락 맞는 사내, 사지를 뒤틀며 피를 토하는 환자, 일본인 집의 기괴한 분위기, 대형견의 야생적 울부짖음을 지나, 고성을 지르는 소녀와 되살아난 시체의 몸부림, 급기야 악마의 전형적인 형상을 포착한 클로즈업 등과 차례로 마주하게 된다. [곡성]은 서사의 기승전결을 해체하는 대신 감각의 기승전결을 고양한다. 감독이 머리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논리로부터 미끄러져 감각의 노예가 된다.
[곡성]은 자기 확신에 빠진 인물을 고난의 덫에 놓으면서 스스로는 끊임없이 자기 확신의 제스처를 취한다. 현혹되지 말라더니 현혹하는 장치를 동원한다. 논리의 기승전결은 없다더니 감각의 기승전결에 의존한다. 결국 내가 느끼는 위화감은 진술하는 방식이 진술하는 내용을 지워버리는 [곡성]의 자기 모순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 [곡성]은 어떤 방식으로도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지만 또 어떤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영화다. 이 자체가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닫힌 공간에서의 놀이에 불과하다. [곡성]에는 퇴로도, 갓길도 없다. 우리는 영화에 설계된 속임수의 방에 들어가 계산된 만큼의 혼돈을 경험한 뒤 그 방을 나온다. 이것은 흡사 ‘현혹’이라는 운명이 예정된 사다리 타기와 같다. 우리는 폐쇄회로를 경유했을 뿐이다.
무명(천우희)은 “지 딸 애비가 죄를 졌응께. 남을 의심하고 죽일라 하고 결국에 죽여 버렸어”라고 말한다. [곡성]이 미끼를 던졌고 우리는 충실히 낚였다 치자. 인간은 의심하고 현혹되는 나약한 존재라고 치자. 그렇다고 인간은 단죄되어야 하는가.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죽어 마땅한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이 부정당해야 하는가. 죽은 자가 되살아나 필요 이상으로 길고 우스꽝스러운 좀비 액션 신의 주역으로 굳이 ‘활약’해야만 하는가. 이 모든 것이 쇼이고 코미디라면 [곡성]은 왜 사실적인 재현을 고집하는가. 나는 [곡성]이 상찬의 대상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글.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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