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에 어설픈 색깔론을 덧씌우지 마라

듀나 2013. 7. 3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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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헛된 정치적 해석을 경계하는 이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봉준호의 < 설국열차 > 의 원래 개봉일은 8월 1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하루 앞당긴 7월 31일로 개봉일을 변경했다. 그걸 보고 "봉준호 감독은 영화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을 하고 있던거 같은데 영화의 흥행전략만큼은 매우 신자유주의스럽다"라는 모 파워 트위터리언의 트윗이 뜬다.

이런 식으로 개봉일자를 앞당기는 치킨 게임은 신기한 구경거리이다. 치킨 게임이 그런 것처럼 이 역시 한계가 있다. 일주일에는 겨우 일곱 날밖에 없다. 그럼 한계는 수요일인가? 혹시 화요일까지 앞당겨지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한 바퀴를 돌아서 월요일?

그러나 내가 진짜로 관심을 가지는 건 < 설국열차 > 를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보는 관점이다. 영화를 암만 노려봐도 그런 식의 분석은 괴상해진다. 우선 < 설국열차 > 안에서 자유주의는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다. 100칸의 열차라는 폐쇄된 생태계 안에서 자유 교역 같은 건 존재할 수가 없다. 앞쪽에 있는 승객들이 신자유주의의 혜택을 받은 부자들일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작은 나라의 독재자일 수도 있고 은퇴한 연예인일 수도 있다. 이 행성에서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 신자유주의에 편승하는 것이던가? 어차피 열차에 오른 뒤에는 이들이 무슨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비판 대상이라는 신자유주의는 지구 문명과 함께 멸망해버렸으며, 영화 내에서는 신자유주의와 비슷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굳이 언급해서 뭐하게?

한 칸 건너 뛰면 가능해지긴 한다. < 설국열차 > 에서 커티스 에버렛의 혁명을 '월 스트리트 점령'의 상징으로 놓는 것이다. 이건 이해할 수 있다. 그림부터가 직접 비유가 가능하니까. 이 영화가 제작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칸 건너 뛰어 신자유주의 비판이라? 그건 지나치게 임의적이 된다.

게다가 이것이 그렇게 해서라도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이어지려면, 영화가 혁명을 전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되어 말을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는데, 정답만 미리 말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의 주제는 그보다 크고 어둡다. 여러분도 이 영화가 어둡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지 않은가. (내 생각엔 < 도가니 > 가 훨씬 어두운 영화 같지만 그건 사견일 뿐이고.) 이건 단순히 혁명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는 어두움이다. < 설국열차 > 를 신자유주의 비판, 계급사회 비판, 하여간 우리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비판으로만 읽으면 영화는 그 순간 수십 배로 작아져 버린다.

'무엇에 대한 비판, 무엇에 대한 상징.' 이런 것들은 보기보다 지겹다. 의미없는 작업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의 장르가 SF이거나 판타지일 경우, 이것들은 불필요하게 남용된다. 비평가들에게 이 장르에 속한 작품들을 보여주어 보라. 그들이 가장 먼저하는 일은 작품과 현실세계의 접점을 찾는 일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그 작품의 구체적인 요소를 그들이 아는 현실세계에 대한 비유나 상징으로 읽는다. 그 순간부터 작품 전체는 그 비유와 상징 안에 감금된다.

접점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공감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허구의 세계가 모두 현실 세계의 반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도대체 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가? 이미 현실세계를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들인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보는 것 이외엔 관심이 없는가?

당연한 이야기 하나. SF와 판타지 장르의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물론 그 장르에 속한 작가들이나 감독들이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를 목적으로 그 세계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온전하게 완성된다면 그 세계는 자기만의 독립성을 갖는다. 조지 오웰의 < 1984년 > 처럼 노골적인 풍자물일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런 작품들을 제대로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그 세계를 존중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비유와 상징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를 바탕으로 원고를 쓰는 것도 그만큼이나 쉽다. 하지만 허구의 세계는 그 이상을 담고 있고 늘 그 이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누구나 5분이면 찾을 수 있는 '월 스트리트 점령' 비유를 넘어선 그 작품만의 무언가를, 단순히 비유와 상징으로 치환되지 않는 작품의 핵심을 먼저 찾는 것이 비평가들의 진짜 목표여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시간이 나면 '월 스트리트 점령' 이야기도 하자. 어차피 그 이야기도 언젠가 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 설국열차 >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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