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 어쩌다 30대 여성들을 빠순이로 만들었나

신동립 2011. 2. 2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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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문원의 문화비평

현빈 주연영화 '만추'가 호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17일 개봉한 '만추'는 18일 오전까지 11만9599명을 동원, 실화 미스터리 스릴러 '아이들…'에 이어 2위에 랭크됐다. 비록 1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빼도 박도 못할 멜로영화 비수기인 1분기 시장에 파란을 일으킨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시장성향 자체가 바뀐 건 절대 아니라는 분석이다. '만추'의 초반 흥행쾌조는 더 논할 것도 없이 100% 현빈 덕택으로 봐야하기 때문. 그것도 현빈 본인의 스타성 덕택으로 보기도 힘들다. 지난 1월 종영한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 역을 맡아 일으킨 '김주원 현상'이 메아리 효과를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물론 드라마 종영 후 해병대 입대 등 이슈로 현빈 본인의 화제성이 높아진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재의 이상 열기는 '김주원 현상'에 발화점과 중심이 모두 쏠려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런데 이 '김주원 현상'은 '만추' 개봉과 더불어 꽤나 독특한 자료를 남기고 있다. 영화예매사이트 맥스무비의 예매관객 분석 결과 '만추'를 개봉 첫 주 예매한 관객의 80%는 여성이었으며, 그 중 30대 이상이 무려 77%를 차지했다는 것. '만추'가 어떤 의미에서건 딱히 30대 여성 구미에 맞는 콘텐트는 아니었다는 점에 비춰볼 때, 결국 현빈에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계층, '김주원 현상'의 진정한 주역은 '30대 여성'으로 놓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는 얘기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 간단하게만 봐서는 먼저 연령대 설정문제부터 짚을 수 있다. 김주원은 근래 끊임없이 쏟아지던 왕자님 캐릭터들 중 오랜만에 등장한 30대 설정이었다는 것이다. 21세기 초반 인터넷소설가 귀여니의 등장으로 재점화된 왕자님 열풍은 애초 여중고생 대상 인터넷소설 기반으로 시작된 흐름이어서 연령대 설정이 턱없이 낮았다. 기껏 많아야 20대 초중반, 대부분 10대 후반 남성이 주인공이었다. 이런 붐이 영상매체로 넘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적용, 2003년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부터 2009년 KBS2 '꽃보다 남자'에 이르기까지 '어린 왕자님'들의 대세가 이뤄졌다.

김주원은 이런 붐 한 가운데서 불거져 나온 보기 드문 30대 왕자님이었다. 설정표대로라면 33세이며, 그의 연인으로 설정된 길라임은 29세, 그 역을 소화한 하지원의 실제 나이는 34세였다. 결국 30대 여성층이 동질감을 갖고 지켜보기에 적합한 '세대 맞춤형 왕자님'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김주원에 대한 30대 여성층의 유난한 애정을 비단 연령대 일치로만 놓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따지고 보면 30대 왕자님이 그간 TV드라마 등에서 아예 안 등장했던 것도 아니고, 왕자님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감 가는 30대 남성상 정도는 빈번할 정도로 영상콘텐츠에 쏟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김주원이 아니었고, 그 정도 사회문화 현상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그들과 김주원의 결정적 차이는 대체 뭐냐는 것이다.

전에 없이 재치 있고 유려한 대사, 현빈과 김주원 간 탁월한 싱크로율 등 여러 요소를 들 수 있겠지만, 설정상의 근본적 차이를 짚어볼 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의외로 '머리'다. 김주원 등장 직전까지 주류 왕자님 캐릭터로 인기를 구기한 귀여니풍 왕자님은, 기본 바탕 면에선 김주원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일단 미남에 부잣집 아들이다. 나르시시즘적 성향도 지니고 있다. 온실 속에서 자란 듯하지만 의외로 아픈 과거의 상처도 있다. 그리고 여성의 마조히즘과 모성본능을 동시에 자극하는 까칠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좀 특이한 요소가 더 붙었다. 귀여니풍 왕자님은 공부도 못하고 상황 파악도 잘 못하는, 머리가 텅 빈 무뇌아들이라는 점이다. 퍼뜩 떠올려 봐도 구준표 등 해당사례들이 많다.

그러나 김주원은 다르다. 김주원은 똑똑하다. 미국 명문대를 나오고 사업에도 수완을 보이는 등 극중 제시된 '조건' 차원 얘기만은 아니다. 그런 '조건'은 귀여니풍 왕자님도 때때로 차용하곤 했다. 김주원은 단순 '조건'이 아니라 실제로 캐릭터 자체가 지적이다. 김주원의 대사는 극단적으로 까칠하면서도, 동시에 지성미가 있다. 날카로운 위트를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단어 사용과 표현의 적확함 면에서도 모두 탁월하다.

동시에 사고방식 자체도 상식적이고, 때로는 현명하기까지 하다. 일단 현실감각을 잃지 않는다. 대기업 자제쯤 되는 부유층(극중 표현대로라면 '사회지도층') 남성이 서민층 여성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 명확히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런 부담을 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럼에도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자, 그 자세 그대로 계속 상황을 호전시키며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 한다. 학교 성적이 좋건 나쁘건, 기본적인 사고와 행동패턴은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렀던 귀여니풍 왕자님들과 크게 다른 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를 30대 여성층은 오랜 기다림 끝에 반갑게 맞았다는 얘기다.

대체 왜 30대 여성층과 10~20대 여성층 사이 선호하는 왕자님 캐릭터는 이처럼 기묘한 차이를 보이는 걸까. 먼저 10~20대 여성층, 이른바 '귀여니 세대'의 '무뇌아 왕자님' 설정은 이유가 분명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사춘기를 맞이한 세대, 이른바 '경제 불황 세대'의 특성이 드러난 부분이기 때문이다.이 세대에게 '지성'이란 적어도 이성적 매력의 핵심 요소는 아니다. 그보다는 현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능력', 곧 '재력'이 매력의 중심이 된다. 그러다보니 지적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취업이나 급여와 직결되는 학벌, 학업성취도 등이 됐고, 그나마도 집이 원래 부자여서 취업할 필요도 없고 연봉계약 따위 생각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마련되면 무의미한 것이 돼버렸다. 한 마디로 왕자님의 기본조건인 미남 설정에 집이 부자라는 설정이 더 붙어버리면, 그 외에는 딱히 더 바랄게 없는 셈이다.

오히려 머리까지 좋으면 더 문제가 됐다. 미남에 이성적 매력이 있으면 다른 여성의 유혹이 끊이지 않고, 선택의 여지도 많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재벌가라는 계급적 코드가 붙다보니 계급 갈등의 공포가 일어날 수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새롭게 추가된 코드가 바로 '무뇌아'라는 것이다. 그래야 여성이 '브레인'이 돼 남성을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도 여성이 '역할'할 수 있는 여지가 남게 된다. 가진 게 워낙 많아 불안하지만 어차피 내 손 안에 있고 내가 없으면 단순한 바보에 불과하니 안심, 이라는 코드다. 은근히 발칙한 발상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30대인 여성층은 다르다. 1990년대 호황기에 청년기 대부분을 보냈거나, 최소한도 경제 불황 이전 사춘기를 겪었던 이들이다. 다른 경제 상황, 환경적 조건만큼이나 이들의 가치관은 현 10~20대와 크게 다르다. 한 마디로 호황기 청년세대 특성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문화수준에 신경 쓰고 지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컷 하나가 5분 이상 지속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영화 '희생'을 전 세계에서 가장 크게 히트시킨 세대다. 인디 음악 빅뱅을 일으키고, 뮤지컬과 오페라 장르 융성에 혁혁한 공을 세운 세대다. 딱딱한 인문과학 서적들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낸 주역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들 30대 여성층의 왕자님은 절대 '무뇌아'가 될 수 없었다. 기본적인 지성은 갖춘 지식인, 최소한도 상식적인 사고를 하며 거침없는 독설이더라도 정확한 표현을 동원해 자기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정도는 돼야 했다. 한 마디로 '대화가 가능한 남성'이어야 했다.

30대 여성층은 사실상 그 외에도 남성에게 '바라는 게 참 많은' 세대다. 일단 대화도 가능해야 하지만, 경제 불황기를 맞아 일정 정도 이상의 재력은 갖추는 게 '기본'이 됐다. 미적 쾌(快)를 중시한 세대여서 외모에 대한 가치도 높았다. 여성주의의 진행 도중 일대 경제 불황을 맞이한 세대라, 남녀평등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가부장적 의무는 그대로 짊어지는 슈퍼맨형 남성을 바라기도 한다. 이처럼 바라는 건 많은데 현실 속에서는 물론 TV드라마 등 판타지 세계 속에서도 원하는 남성상이 충족되지 못하다, 마침내 이 모든 부분을 총집결시킨 30대 여성의 완벽한 이상형 왕자님 김주원이 등장해버리니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반가움과 열기는 현빈이 김주원 캐릭터와는 아예 정반대로 분한 '만추'까지도 팔아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극단적이고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30대 여성층의 '김주원 현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더 깊은 관찰을 필요로 하고 있다. KBS2 '겨울연가'의 '준상' 캐릭터가 일본에서 중장년 여성층이라는 충성도 높은 시장을 발굴해낸 것처럼, 김주원으로 비롯된 '30대 여성층 왕자님' 콘셉트는 국내 영상콘텐츠 시장에 확고한 계층 시장을 마련해줄 기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대 여성층의 문화소비욕구는 알려진 것처럼 대단한 수준이다. 성별과 10년 단위 연령대로 잘게 끊어 생각해보면 사실상 모든 계층 중 가장 왕성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계층만 제대로 붙들어놔도 꽤 안정적인 시장이 확보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들의 판타지, 해소되지 못한 욕구, 긁어주지 못한 가려운 부분들을 더 연구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할리우드 스타 해리슨 포드가 배우라는 직업의 속성에 대해 언급한 코멘트를 빌자면, 결국 대중문화산업 전체도 "불난 곳에 가서 불을 꺼주는 역할"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불난 곳은 김주원 이미지를 잊지 못해 찾은 '만추'의 상영관이다. 이제 어떤 소방차를 보내 어떻게 불을 꺼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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