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비교는 허용하며 후보 우열 표시는 금지 '모순된 선거법'

강병한 기자 2012. 12. 2.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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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공약 장단점·현실성 등 우열 말할 수 있어야"

후보자별 공약의 점수화나 등급화를 금지한 공직선거법 '제108조 2'는 무엇이 문제인가.

음식을 두고 '맛있다' '보통이다' '맛없다'고 느끼는 것처럼 공약 평가라는 것은 우열에 대한 판단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비교는 허용하지만, 등급화는 불허한다는 현행 선거법은 그 자체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 슈퍼스타 K > 에서 이승철 심사위원이 출연자를 평가만 하되 점수를 줄 수 없는 꼴이다.

'비교 가능·등급화 불가능'의 어정쩡한 조합으로 인해 공약 검증은 나열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언론사의 공약 검증이 대부분 '어떤 후보의 공약은 이것이고, 다른 후보의 공약은 저것이다'라고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는 이유다.

가장 큰 문제점은 정책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한 점이다. 예를 들어 특정 학계나 언론사 입장에서 친환경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를 점수화해 유권자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판단은 유권자의 몫이지만 이를 사전에 원천봉쇄하는 것은 알 권리 침해일 수 있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은 "오늘 발표된 검찰개혁 공약 역시 학계나 전문가들 입장에서 장단점과 한계, 타당성과 현실성을 보고 검찰개혁안의 우세나 열세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언론사의 공약 평가가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대체되면 유권자는 더욱 혼란스럽게 된다.

나열식 공약 평가는 정책 평가의 공론적 '기준'을 형성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든다. 정책을 가늠하는 기준은 유권자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이념, 타당성, 일관성, 현실성, 논리적 정합성, 취향 등 다양하다.

다만 어떤 기준에서든지 유권자나 언론사는 그 기준에 따라 호불호의 정도를 측정하고 이를 공개해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기준이 마련될 수 있다. 모두가 평등하게 나열하는 평가에서는 우열을 가늠할 준거는 나올 수 없다. 자유롭고 다양한 공약 평가에서 여러 기준이 형성되고 이 기준들을 놓고도 치열한 토론이 이뤄지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모으는 기준들이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보니 정책토론은 추상적인 공론이나 이념논쟁으로 흐른다. 각 후보자의 공약들이 비슷하게 보이는 것도 이 같은 기준 미비와 그에 따른 나열식 공약 평가 방식에 기인한다.

고계현 사무총장은 "시민사회나 학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다양한 방법들이 허용되어야 그 내용들을 갖고 토론이 벌어지면서 기준이 마련될 수 있다"고 밝혔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팀장 역시 "선거에서 '돈은 묶고 말은 푼다'는 말처럼 공약 평가는 다양한 방법이 보장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밝혔다.

언론사나 정책집단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점도 있다. 서열화 평가도 하나의 검증 방법이니만큼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역시 자율에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정 후보에 대한 '세뇌' 효과를 가져온다는 반론은 유권자에 대한 무시다. 등급화가 공약평가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 역시 보장되어야 정책선거가 가능해진다.

고 사무총장은 "현행 선거법은 정책선거를 주장하면서 실질적인 정책평가를 할 수 없게 가로막는 악법"이라고 말했다.

< 강병한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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