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공포 마케팅' vs 문 '모범생 화법'

장일호 기자 입력 2012. 12. 17. 10:29 수정 2012. 12. 1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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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말이 권력을 만든다. '폭력'이 아닌 '말'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다. 그래서 말은 정치인에게 무기이자, 자산이다. 그래서 대선 텔레비전 토론은 각 후보가 그 무기와 자산을 얼마나 잘 활용해 '미래 체계'를 만들고자 하는지 확인할 좋은 근거가 된다. 이들이 내뱉은 말은 '공약'이 되고, 당선 뒤에는 '책임'이 된다.

12월4일 박근혜(새누리당), 문재인(민주통합당), 이정희(통합진보당) 대선 후보의 첫 텔레비전 토론이 열렸다. 이번 토론은 박빙의 지지율 경쟁을 벌이는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첫 만남'으로도 이목을 끌었다. 두 후보 중 누가, 어떤 말로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끌고 올 것인가. 그리하여 막판 판세를 뒤흔들 후보는 누가 될 것인가 등이 관전 포인트로 꼽혔다.

ⓒ사진공동취재단 12월4일 박근혜(새누리당), 문재인(민주통합당), 이정희(통합진보당) 대선 후보의 첫 텔레비전 토론이 열렸다(오른쪽부터).

그러나 토론이 끝나고 쏟아진 각종 관전평과 패러디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이정희 후보는 '혼내고', 박근혜 후보는 '혼났고', 문재인 후보는 '혼자였다'. 그랬다. 이른바 '명장면'을 만들어낸 것은 여론조사 지지율 1%대의 이정희 후보였다. "(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나왔다"라는 이 후보의 발언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직설적이고 명료하다. 어차피 대선 레이스의 승자는 단 한 명이다. 승자독식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토론을 통해 '명장면'만 소비할 수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후보의 말에 담긴 메시지다. < 시사IN > 과 네트워크 분석 전문기업 '트리움'은 텔레비전 토론에서 나온 세 후보의 말을 '의미망 분석'을 통해 살폈다.

의미망 분석이란 발화자의 말을 컴퓨터가 분석해 '의미망(네트워크) 지도'를 만드는 분석 기법이다. 발언에서 키워드가 등장하는 빈도는 물론이고 키워드 간의 거리(문장에서 각 키워드의 위치)와 키워드의 연결 형태를 계산해 의미망 지도를 그린다. 지도에서 같은 색깔의 키워드들은 동의어 덩어리로, 화살표는 논리의 흐름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이를 통해 단순히 토론의 승패가 아닌, '속내'와 '약점'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림 1]박근혜 후보(왼쪽)는 위기를 '분열' '갈등'과 동일시하며 문재인 후보를 실패한 과거라고 비판했다. 이는 이명박 정부와도 선을 긋는 효과적 담론이다.

'박근혜 대 이정희', 둘 다 웃었다

박근혜 후보의 전략은 분명하다. 박 후보의 발언을 분석해보면 '위기'가 핵심 키워드로 나온다. "지금도 국민 삶이 이렇게 어려운데 내년에는 더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가 들리는 이 마당에…" 같은 발언은 불안감을 부각시키는 전형적인 보수 담론이다. 이러한 '공포 마케팅'은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단순화하고, 사람들을 결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논리적 긴밀성과는 거리가 먼 화법이다.

박 후보의 프레임 지도인 < 그림 1 > 을 보자. 박 후보는 위기를 '분열' '갈등'과 동일시한다. "이번 대선은 우리나라가 준비된 미래로 가느냐, 실패한 과거로 돌아가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다." 박 후보는 본인을 준비된 미래로 설정하면서, 상대 후보를 실패한 과거로 떨어뜨린다. 결국 분열과 갈등의 생산자는 상대 후보가 된다. 이는 이명박 정부와도 선을 긋는, 효과적인 담론이 된다.

본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 역시 이 담론으로 설명 가능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 통합'이 필요하고, 적임자는 자신이며, 이유는 본인이 선점한 신뢰의 리더십으로 설명한다("신뢰를 저의 생명처럼 생각한다").

토론 초반 박 후보의 말은 반복적이고 '일관성'을 갖는다. '위기'를 강조하며, 절대 자신에게 불리한 구도를 만들지 않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한다.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타깃은 명확하다. 북한에 '퍼주기'를 하고, 그래서 '가짜 평화'를 유지한 '책임'이 있는 '참여정부'의 문재인 후보다.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문제 제기 역시 그 연장선에서 나왔다.

검찰·재벌 개혁 등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용을 이야기하는 대신, "제가 발표한 것 알고 계실 거다" "대통령이 되면 강력한 의지로 실천하겠다"라는 말로 눙친다. 공격 포인트는 정확하게 숙지했고, 적극적인 수비 대신 그저 피해간다. 박 후보의 프레임 지도가 다른 후보에 비해 한결 단순한 이유다.

분석을 담당한 김도훈 트리움 대표는 "상대 후보를 분열과 갈등으로 프레이밍 하는 것에서 '다름'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미래가 중요하다는 대중의 상식에 소구하면서, 이를 위기 극복과 국민 통합의 당위, 그리고 중산층의 행복에 대한 희망으로 정당화하는 담론 구조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놓였을 때 메시지 관리에 취약하다. 이번 토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정희 후보와의 상호 토론에서 박 후보는 태도와 표정 같은 비언어적인 부분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박 후보는 문 후보에 대한 '공부'는 충분히 했지만, 이 후보를 간과했다. 박 후보의 스텝이 꼬인 이유다.

[그림 2]이정희 후보(오른쪽)는 양극화를 가속화한 '재벌'과 '대기업' 중심 체제를 만든 사람이 '박정희'라고 본다. 박근혜 후보는 그 연장선에 있는 사람이다.

박 후보에게 과거사 이슈는 치명적이다.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들고 나오는 건 나에 대한 공세" "과거 말고 미래를 이야기하자"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라는 문구는 과거사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반복됐던 박 후보의 단골 대사다. 이 후보는 이 같은 박 후보의 약점을 파고든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받은 6억원, 정수장학회, 영남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 등을 언급하며 이를 '비리'와 '장물'로 규정짓고 몰아붙이는 이 후보 앞에서 박 후보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정희 후보는 작정하고 네거티브를 해서 어떻게든 박근혜라는 사람을 내려 앉히려는 것 같다"라는 정도의 항변이 박 후보가 이 후보에게 한 수비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에는 '돌발 발언'도 나온다. 외교정책 질의를 해야 하는 상호토론에서 주제와 상관없이 이 후보에게 "단일화를 주장하면서 토론회에 왜 나왔느냐"라는 질문을 던진 것.

사실상 당선권에서 거리가 먼 이 후보로서는 최선의 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이 후보는 '비정규직'을 가장 강조했지만, 이 후보 발언의 속 의미를 살펴보면 결국 박 후보의 사퇴로 모아진다. 담론 구조를 살펴보면 이렇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중요한데,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박 후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후보의 프레임 지도인 < 그림 2 > 를 보면, 양극화를 가속화한 '재벌'과 '대기업' 중심 체제를 만든 사람이 '박정희'였고, 이를 비리의 시초로 인식함을 볼 수 있다. 이 후보가 보기에 박 후보는 그러한 구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람이다.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면 사퇴한다고 약속해라" "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토론에 나왔다" 같은 발언이 나온 맥락이다.

그러나 토론의 구도가 '박근혜 대 이정희'로 가면서 결과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존재감은 약해졌다. 토론이 끝난 후 박근혜 캠프가 여유를 보인 이유다. 대선주자로서 '잃을 게 없는' 이정희 캠프 역시, 통합진보당의 존재를 유권자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문재인, 이토록 성실한 모범생

"잘 안 되네요." 토론을 마치고 나오면서 문재인 후보가 기자들에게 씁쓸한 듯 웃으며 한 말이다. 문재인 캠프는 그동안 토론에 자신감을 보여 왔다. 문 후보가 변호사 출신으로 논리정연하며, 국정 운영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어 국정 이해도가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문 후보 역시 이날 토론에서 자신의 국정 경험을 강조하려 애썼다. 그러나 관건은 '전달'이었다.

이번 토론에서 문 후보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문 후보를 축구선수 포지션으로 설명하자면 마치 수비수 같았다. 수비수는 '최선의 공격'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포지션이다. 역공은 한 차례에 그쳤다. 박근혜 후보가 저축은행 외압 의혹과 아들의 부당 취업 의혹, 다운계약서 문제 등을 들고 나왔을 때였다. 문 후보는 "박 후보조차도 네거티브를 하니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받아쳤다. 물론, 이조차도 방어의 성격이 짙다.

박근혜 후보와 비교하면 문 후보의 프레임 지도( < 그림 3 > )는 훨씬 복잡하다. 준비는 철저했다. 특히 첫 토론의 주제가 '정치·외교·통일·안보'였던 만큼, 상대 후보의 공격 지점(대북정책·NLL 등)을 정확히 예측했고, 문 후보는 이를 꽤 적절히 수비한다.

[그림 3]문재인 후보(오른쪽)의 의미망 지도는 복잡하다. 남북문제의 경우 '성장 동력'이라는 프레임을 앞세워 단순한 외교·안보가 아닌 경제 이슈로 확장한다.

< 그림 3 > 을 보자. 문 후보는 남북 문제를 '실천'과 '합의'라는 상대 후보가 반대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정리한다. "참여정부 5년간 북한과의 단 한 차례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 "10·4 선언에 담긴 48개 남북간 경제협력 사업을 차근차근 실천만 해도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와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NLL 관련 대화록 공개에 대한 박 후보의 공세에도 "단호하게 사수해야 한다는 의지를 여러 번 밝혔고, 공동 어로구역이야 말로 NLL을 확실히 지키며 경제 이익도 얻는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이슈에서 문 후보는 '성장 동력' 프레임을 앞세워 남북문제를 단순한 외교·안보 이슈가 아닌 경제 이슈로 확장한다.

또 하나 예측 가능한 공세는 통합진보당과의 단일화 여부였다. 박 후보는 통합진보당의 대북관을 지렛대 삼아 문 후보에게 지난 총선의 단일화를 비판하고, 대선에서의 단일화 여부를 추궁한다. 이에 대해 문 후보는 "지금은 연대할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라며 선을 긋는다.

이에 비해 회심의 공격은 먹혀들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안보 무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문 후보의 추궁에, 박 후보는 '이명박'을 입에 올리는 대신 평화를 진짜와 가짜로 구분한다. 박 후보는 "퍼주기를 통한 유지는 가짜 평화다"라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햇볕정책을 간접으로 비판했고, 의도적으로 어물쩍 넘어갔다.

대북문제와 NLL 같은 이슈가 문 후보의 예측 가능한 수비 포인트였다면, 정치 혁신·검찰 개혁따위 이슈는 공격 포인트여야 했다. 문 후보는 이 지점에서도 점수 얻기에 실패한다. 시도는 했다. 주요 정치 혁신을 비롯한 개혁 정책과 경제민주화를 위한 구체적 입법에 '반대'해온 새누리당과 박 후보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고("새누리당은 비리 백화점" "만사올통" "정치검찰"), 자신의 주장이 보다 실효성 있음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여야 협력을 강조("공통 정책은 당장이라도 입법하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여야 정책협의회를 만들어 논의하자")하며 끌어안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슈에서 문 후보의 '설명'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장황했다.

김도훈 대표는 "성실한 모범생의 이성적인 담론 구조다. 그러나 자신의 논리 완결성에 집착한 나머지 대중에게 각인시켜야 할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왜 박근혜가 아닌 문재인이어야 하는가'를 효과적으로 유권자에게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대 후보의 공격에도 너무 '성실'하게 대응했다. 이는 그가 '참여정부'를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반성을 표한 데서도 드러난다. 문 후보로써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지만,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상대의 프레임에 '말렸다'.

치열한 공방이 오갈 수 없었던 토론 방식만 아니었다면, 문 후보가 자신의 의지대로 논리적 대응과 신사적인 태도를 부각시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토론 방식만 탓할 수 없다. 김도훈 대표는 "(이정희 후보에게서 보이듯) 공격이 최선의 방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후보의 태도가 아닌 담론 구조에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말의 내용보다는 그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 패기와 집요함이 필요하다"라고 평가했다.

장일호 기자 /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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