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 진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정용인 기자 입력 2012. 12. 29. 15:38 수정 2012. 12. 2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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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요약하면 '멘붕'이다."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한 진보개혁 진영의 반응이다. 다시 말해 망연자실이다. 기력 상실이다. '박근혜 정부' 5년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다음 2017년 대선이 되면 세대 절반의 연령대가 바뀐다. 3040세대의 절반이 4050세대로 이동한다.

대선 후 일주일이 지나면서 다양한 패인 분석이 나온다. 백가쟁명이다. 정반대의 진단도 나온다. 이번 대선이 진보개혁에 '이길 수 있는 대선'이었냐는 물음에 대한 답부터 다르다. "이길 수 없는 대선이었다"고 답하는 쪽은 2012년 11월 23일 안철수 전 후보가 후보 사퇴 선언을 했을 때부터 이미 결론은 정해진 선거였다고 본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가는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프레임이나 전략 설정에서 실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선거 당일까지 박근혜 당선인 쪽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라는 것이다. 오후 6시,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박근혜 캠프의 핵심 인사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젊은층의 높은 투표율 때문에 "2002년의 결과가 재현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지배적인 우려였다. 방송3사 출구조사를 제외한 당일 여론조사 결과 대부분도 실제 결과와 정확히 반대였다. 문재인 후보 측이 내다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최하 109만표에서 최대 160만표 승리였다. '민주당 낙승'에 대한 정보는 일부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서도 흘러나왔다.

지난 18대 대선 당시 개표장에서 투표지를 분류하는 모습./김창길 기자그렇다면 막판에 방심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표차가 컸다. 새누리당 측도 미처 예상 못한 장년층의 자발적 지지가 승패를 갈랐다는 뜻이 된다. (박스 참조)

2012년 대선, 이길 수 있는 선거였나

2007년의 결과보다 사람들이 받은 충격이 더 큰 이유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수 총집결에 맞서는 '범진보연대'로 정권교체가 가능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선 이후 나오는 전망에서 오는 충격 역시 만만치 않다.

"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박근혜 당선인이 잘할 걸로 본다." 12월 28일, 기자와 통화한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보편주의적 복지는 안하겠지만 선별적인 시혜적 복지는 그 이전 누구보다도 잘하지 않을까. 어머니 육영수 여사처럼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 만나고 하는…. 남북관계도 어쩌면 노무현 때보다 잘할지도 모른다. 박 당선인이 개혁의지가 있다면."

최 교수가 박근혜 정권이 상당히 안정적인 보수정권이 될 것이라고 보는 근거는 지금 대선 결과 해석에서 나오는 것처럼 정권을 뒷받침하는 인구구조적 요인만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사회·문화·언론 등 모든 면에서 보수 우위가 공고화되고 있는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결국 우려는 일본의 반세기 자민당 집권처럼 그런 보수 독점지배체제에 들어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12월 26일, 여의도에서 열린 '민주진보정책연구소 준비모임'에 참석한 최 교수는 "민주당은 이제 국회에서 단독 과반을 달성한다든가 대선에서 단독 집권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앞으로 만들어질 안철수 신당을 포함해 정치지형이 '4당체제'로 변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도보수'와 연합정치를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진보의 집권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진보개혁은 독자 집권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넘어 상당히 오랜 기간 집권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전망이다. 방법은 없을까. 최 교수는 "그래서 제도개혁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진보개혁의 목소리가 들어갈 여지가 작다. 그러기 때문에 판을 바꿔야 한다. 플레이어 즉, 후보와 리더십 교체가 아니라 고쳐야 하는 것은 경기의 룰, 즉 제도다."

큰 틀에서 현재의 선거에 적용되는 '룰'이 만들어진 것은 1987년이다. 독재정권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이른바'87년 체제'다. 직선제와 소선구제를 특징으로 하는 이 체제는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과 대통령에게 힘을 몰아주는 이른바 '승자 독식 민주주의'다.

2012년 12월 20일, 서울 영등포 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문재인 후보 '담쟁이 캠프' 해단식에 참여한 문재인 18대 대선후보가 자원봉사자를 안아주며 격려하고 있다./강윤중 기자 박근혜 이후, 보수의 장기집권?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87년 체제의 종식'과 그를 대체하는 '2013년 체제'를 언급해 왔다. 2013년 2월부터 시작하는 박근혜 정권은 87년 체제와 단절할 수 있을 것인가.

최 교수는 "승자 독식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권력 공유·합의·협치형 민주주의인데,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이나 안철수와 같은 야권 후보들은 집권 후 그런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선거의 확대, 결선투표의 도입 등 선거제도의 개선을 약속했었다"며 "박근혜도 중임제 개헌 등의 정치쇄신안을 내놓기는 했는데, 그동안 87년 체제 내내 최대의 수혜세력이었던 새누리당이 과연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는 길에 나설지는 솔직히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87년 체제를 극복한 '2013년 체제'를 적극적으로 설파한 인사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였다. 백 교수는 12월 28일 '창비 주간논평'에서 "박 당선인이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시대교체를 이룩하겠다'고 밝힌 것처럼 (내가 주장해온) 2013년 체제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마당에 실패를 미리 예단하고 악담을 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진보도 방기할 것이 아니라 박 당선인이 스스로 내건 공약을 제대로 지키는지 적극 감시하고 또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책이 있다. 미국 정치학자 알버트 허시먼의 <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라는 제목의 책이다. 책의 원제는 'The Rhetoric of Reaction', 즉 '반동의 수사학'쯤으로 번역될 수 있다.

허시먼에 따르면 지난 200년간 전 세계 정치사에서 관찰되는 반동의 수사학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역효과 명제다. 둘째는 "그래 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는다"는 무용 명제이며, 셋째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위험 명제다. 얼핏 보았을 때 이 주장은 한국의 보수세력, 구체적으로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가 취한 전략을 설명하는 틀로 보인다. 틀린 건 아니다. 보편복지로 증세가 이뤄지면 결과적으로 서민의 삶은 더 힘들어진다든가, 참여정부 NLL 대화록 공개 이슈 등을 통해 "진보에 정권을 맡기면 안보가 불안해진다"는 논리를 편 것이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이 책은 '진보가 어떻게 하면 보수에 맞서 승리할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 대한 반동(reaction)의 수사학은 주로 보수가 취하는 입장인 것은 맞지만, 변화를 말하는 진보 역시 때때로 닮은꼴의 전략을 취한다는 것이다. 결국 보수와 진보는 지난 200년 동안 '귀머거리의 대화'를 해왔다는 것이 허시먼의 결론이다. 사실상 상대방과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논리적 고안물이 바로 반동 명제이며, 이것이 '민주주의 친화적인' 공적 담론 형성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반동, 진보도 닮은 꼴"

"처음 만났을 때 다른 진영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대한 거리감은 꽤 있었다. 처음 인사말을 주고받았는데, 바로 앞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의 말을 듣고 바로 시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쓰는 단어 하나에도 예민한 반응이었다. 모임이 몇 차례 진행된 뒤 달라졌다. 분명히 다른 생각이고 불편한 이야기일 텐데도 넘어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상종 못하겠다'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문제의식은 유사하지만 다른 해법을 갖고 있구나'라는 데까지 나아갔다."

지난 2009년부터 '아름다운 동행21'(동행21)이라는 이름으로 진보·보수 활동가 집담회를 진행해온 이형용 거버넌스21클럽 상임이사의 말이다. 집담회가 거듭하면서 공통분모는 늘어났다. 2012년 8월에는 '21세기 진보·보수의 재구성을 위한 활동가 대토론회'라는 이름의 1박2일 행사를 열었다. 그 결과물은 2013년 1월쯤 소책자 형태로 발간될 계획이다.

이 상임이사는 82학번이다. 전형적인 386세대다. 1980년대 학생시절, 민주화운동을 거쳐 최근까지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특히 이번 대선을 겪으면서 그가 갖고 있는 결론은 이렇다.

"특히 진보는 선악의 관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정의가 불의를 제압하거나 물리쳐야 한다든가, 권력을 잡아서 뭔가 정의를 실현한다는 식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나 진보·평화·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우리가 그런 세력이니 그렇지 않은 세력을 물리쳐야 하고, 이것이 옳은 가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민의 선택은 우리여야 한다는 관점이 문제다. 그러니까 국민이 우리를 이해하면, 국민이 깨어 있으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점이다."

이 상임이사가 보기엔 '진짜, 가짜' 논리도 그 연장선에서 나오는 논리다. "중요한 것은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을 누가 더 잘 제시하느냐는 것이다. 이번에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면 상대방이 잘되기를 기원해주고 무엇이 부족했는지 잘 검토해 선택을 받는 것이 중요한데, 선악의 프레임을 적용하니 허탈한 마음도 더 큰 것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대선 하루 전인 2012년 12월 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한 소녀로부터 희망사항이 담긴 그림을 전달받고 있다./박민규 기자 진보=선, 보수=악 프레임 벗어나야

허시먼이 제시하는 '반동의 수사학'은 진보담론에도 작동하고 있다. 386으로 특징짓는 기존 진보는 새누리당을 보수로 보지 않는다. '참된 보수, 또는 건전보수라면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처럼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을 선택했을 것이다. 새누리당은 보수의 탈을 쓴 수구다. 기존 진보가 그리는 미래상에서 새누리당은 없어져야 할 상대다. 친일독재수구의 계승자는 완전히 배제한 뒤, 건전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집권하는 체제다.' 기존 진보가 보수를 바라보는 시각의 밑바탕엔 이런 논리가 깔려 있다.

보수도 다르지 않다. MB정부 시기, 자유주의진보연합이라는 단체가 나타났다. 구성하는 면면을 보면 기존의 진보 인사들이 아니라 뉴라이트전국연합 출신 등 보수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이다. 이들의 시각에서 기존의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수구다. 종북이 아닌 자신들이 알고 보면 '진짜 진보'라는 것이다.

동행21에 참여했던 최승국 전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사실 엄밀히 말해 기존의 진보·보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구도의 연장선 속에서 만들어진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재구성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 시민캠프의 공동대표를 맡았었다. 말하자면 '진보 재구성'을 직접 진두지휘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는 "내부적으로 평가해보면 진보의 재구성에 실패했다기보다 시도를 했지만 완성하지 못했고, 선거 이후 진보의 재구성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만들어졌다"며 "진보의 개념 정의부터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과거와 같은 독재와 반독재, 민주 대 반민주로 보면 (이번 선거 결과는) 보수가 늘어났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진보의 고민 축은 누가 더 미래 가치에 가깝고 또 대중의 삶에 가까운가의 시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 19일, 홍대에 위치한 한 카페. 20~30대의 젊은이들이 모였다. 대선에서 투표참여운동을 벌였던 청년들이다. 6시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탄성이 터졌다. 아쉬움과 당혹감이 교차되었다. 이날 결과를 접한 2030세대의 반응은 비슷했다.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제도'를 철회해야 한다는 온라인 서명운동까지 나왔다. 보편복지 대신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후보를 선택했으니, 그에 걸맞은 제도 변경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더 체인지' 활동가 기은환씨(여·26)에게 일주일이 지난 12월 27일 연락했다. 그는 "솔직히 그날 멘붕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페이스북과 같은 SNS, 온라인 게시판을 봤을 때 '우리가 이기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다른 사람'이 당선된 것이다. 투표율을 올리기 위한 운동을 했지만, '우리'가 본 세상이 반쪽에 불과했나 하는 열패감이 들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있다, 바로 이 나라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멘붕을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일단 청년세대 스스로 각성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흐름을 바꿔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들만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세대와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어쩌면 다른 후보를 지지한 51.6%의 국민들에 대해 우리 스스로 벽을 세운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이다."

기씨가 활동하는 '더체인지'는 대화소통 플랫폼을 지향한다.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더 넥스트'라는 이름으로 '소셜학교'를 만드는 것을 고민 중이다. "사실 이전보다 더 많이 정치·사회적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여전히 파편화된 개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것을 엮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면, 당장 그것이 어떤 형태로 발전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 구석구석에서 그런 성과가 쌓이면 다음에는 좀 더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믿는다."

2012년 12월 19일 밤,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 모여든 박근혜 후보의 지지자들이 대통령 당선을 기뻐하고 있다./박민규 기자(박스기사) "'간절함'에서 5060세대가 앞섰다"

진보는 왜 2040세대 전략에 집중했을까. "2040 진보세대가 다수를 점할 것이며, 이들의 선택이 이후 사회 변화에서 핵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것은 지난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후부터다. 무상급식-보편복지를 내건 진보진영의 인사들이 당선된 것에서 증명되듯, 보수 우위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투표율이었다. 2040세대의 투표율이 올라가면 선거에서 이긴다고 본 것이다.

유창오 전 동아시아미래재단 정책실장이 낸 책 < 진보세대가 지배한다 > 는 이 주장을 정식화한 것이었다. 그런데 2012년 4월 총선과 이번 대선 결과가 보여주듯, 이 주장은 틀린 것일까. 유창오씨에게 물어봤다. "최근에 나오는 대선 평가를 보면 너무 자학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진보개혁이 잘못해서 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상대적이다. 조금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진보가 잘못해서 졌다기보다는 상대 후보인 박근혜 당선인이 잘한 측면이 크다고 본다." 박 당선인이 잘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박 후보는 일찍부터 사실상 진보의 의제였던 경제민주화를 제기해 이슈를 선점했다. 즉 시대정신은 진보에 가까웠던 선거를 박 후보가 어떻게 돌파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씨는 이번 선거에서 정책적 차별성은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효과'가 크다고 봤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개인적으로 표 계산을 해봤는데, 50대보다 60대에서 박근혜 후보가 300만표 이상 압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결정적이라고 본다. 한 40대 후배로부터 들은 일화가 있다. 이 후배의 고향은 충청도 보령인데, 선거 전에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후배는 대학을 잘 나와서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60대인 후배의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자식 공부를 시킨 사람이다. 이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죽기 전에 소원이 하나 있는데,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를 찍어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몇 사람에게 들었다. 선거는 간절한 쪽이 이기는 것이다. 5060세대의 간절함이 2040세대의 간절함을 넘은 것이다."

선거 직후, 진보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번 대선 주변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캡처 영상이 화제를 모았다. 주로 5060세대들의 반응이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속내다. 누리꾼 반응 역시 그들의 속내다. "이번 대선으로 확인한 것이 51.6%에 대한 분석은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 그들은 정상적인 대결에서는 불가항력이 아닌가 싶다."

"베이비붐 세대의 불안이라는 것은 저도 당사자니까 느끼고 있다. 이 세대가 무거운 짐을 진 세대라는 분석은 맞다. 자식들은 가르쳐야 하고, 자신의 노후준비는 안 돼 있고,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단지 정책·구호만으로 이들을 돌려세우기는 어렵다. 정말 우리 사회가 선진화된 복지사회로 나가는 튼튼한 정치세력을 희구하는 세대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한 50대 인사의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 세대가 타락했고 변심했다고 하기보다는 좀 더 책임 있고 미래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세력을 바라고 있다고 본다. 독재시대로 돌아가자는 퇴행적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를 했지만, 박근혜 당선인을 찍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27살인 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혹자는 '안철수 현상'이라는 신드롬에 휩싸인 젊은층에 대한 50대의 반격이라고 평하던데, 실제 아들과 이야기해보니 달랐다. 그 또래 세대들이 우리 사회에 가지고 있는 좌절감과 분노는 우리 세대의 불안과 마찬가지로 정당하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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