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간판의 사회학/ /함혜리 논설위원

입력 2008. 3. 17. 04:22 수정 2008. 3. 17.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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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터키 에페소의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돌판에는 심장·동그라미·발·여자 얼굴이 새겨져 있다.'사랑하고 싶으세요? 돈을 가지고 이 길을 따라오세요. 예쁜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발 그림은 유곽의 방향을 나타내는 동시에 발 크기가 그 정도가 되어야만 올 수 있다는 뜻이다. 미성년자 출입불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손님들을 모으려고 유곽에서 설치한 이 돌판을 세계 최초의 광고판으로 공인한다.

상거래가 있는 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간판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가게 앞에 자기가 파는 물건을 적어 놓은 판자를 세워 두는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상업이 번창하면서 간판은 사람들에게 "나, 여기 있소."라고 알리는 자기 존재의 증명이요, 주목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간판은 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업주들은 행인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거의 목숨을 건다. 눈에 띄는 색깔을 쓰고 밤낮으로 번쩍번쩍하도록 조명을 넣는다. 요란한 간판으로 도배를 한 건물도 수두룩하다. 건물 벽도 모자라 간판은 옥상으로 올라가고, 공중으로 튀어나오고, 급기야 땅에까지 내려왔다. 이 정도면 간판은 공해 수준을 넘어선다.

서울시가 그동안 개별사업자에게만 맡겨두던 간판 등 옥외 광고물을 '공공디자인' 차원에서 관리하고 정비하기로 했다. 거리의 품격을 높이고 도시경관의 전반적 업그레이드를 유도한다고 하지만 새로운 규제가 업주들에게는 영 못마땅하다.

그러나 서울시의 가이드 라인은 프랑스 파리의 간판 규제에 비하면 약과다. 파리에서는 관련법이 정한 대로 간판을 설치하는 위치·숫자·규격·색상·재질 등을 명시해 시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통상 3∼4개월 정도 걸리는 허가를 받아도 지역 상인협회나 지역위원회가 거부하면 설치할 수 없다. 파리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이런 규제 덕분이다. 유럽의 대부분 도시들도 비슷한 규제를 하고 있다. 그들에게 도시는 소중한 공공의 재산이라는 인식이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다. 서울시민이라고 그들보다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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