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희의 시시각각] 아내는 맞아 죽어야 하나

양선희 2016. 5. 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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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법은 피해자의 피를 먹고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피해자들의 끔찍한 희생이 중첩돼야만 사법부는 비로소 유사 범죄에 대한 경계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지난해 말부터 엽기적인 아동학대 살해사건이 무더기로 밝혀진 뒤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게 그런 예다. 한데 같은 방식의 폭력과 살인이 무수히 반복돼도 사법부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분야가 있다. 가정 내 배우자에 대한 폭력이 그것이다.

지난주 관심을 모았던 판결이 있었다. 20여 년간 폭력을 일삼은 남편이 이혼 뒤에도 찾아와 칼로 위협하자 그를 살해한 여성에 대한 판결이었다. 사건 당일, 전 남편은 술을 마시고 그녀를 칼로 위협하며 자녀들에겐 “너희는 고아원에 갈 준비나 하라”고 소리질렀다. 이에 그녀는 마늘 찧는 방망이로 그를 후려쳤다. 그가 바닥에 미끄러지자 그녀는 쓰러진 그의 머리를 방망이로 때리고 넥타이로 목을 졸랐다.

변호인 측은 오랜 가정폭력으로 인한 ‘매 맞는 아내 증후군’으로 합리적 판단이 마비돼 살인에 이르렀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문 내용은 이랬다. “피해자가 바닥에 쓰러짐으로써 피해자의 피고인에 대한 침해행위는 일단락되었다고 할 것임에도….”

이명숙 변호사는 이를 “전형적 판결”이라고 했다. 판사들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폭력은 무시하고 일반 살인사건처럼 그 순간 상황에만 집중한다는 거다. 범죄학자 이창무 중앙대 교수는 저서(『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메디치 미디어)에서 가정폭력 범죄에 대한 재판부의 이중성을 지적했다. 30여 년간 폭행당한 아내가 남편을 죽인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이혼하거나 외부에 도움을 청해야 했다”고 판시했다. 반면에 50여 년간 폭행을 일삼다 아내를 죽인 남편에 대해선 “50년간 폭력에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묵묵히 살았던 아내가 피고인의 엄벌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판부의 가부장적 편견도 ‘전형적 재판’의 배경일 수 있다.

이혼하거나 외부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재판부의 생각은 몽상이다. 실제로 이혼 후 폭력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무수히 많다. 외부의 도움? 가정폭력 기소율은 2011년엔 18%였는데 지난해 7월까지 9%대로 낮아졌다. 대신 검경은 주로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로 처리한다. 가정폭력 상담을 하는 ‘여성의 전화’ 측은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는 가해자에게 처벌 기능을 하지 못하고 면죄부를 줘 사태를 악화시키는 나쁜 제도”라고 주장한다.

가정폭력이 살인에 이르는 유형은 이렇다. 아내가 반격해 남편을 죽이는 것, 남편이 폭력 끝에 아내를 죽이는 것, 자녀가 폭력 부모를 죽이는 것. 가족 간 살인으로 치닫는 가정폭력은 벗어날 수 없는 실존적 상황임에도 사법부는 계몽주의 언저리에서 한가하게 서성댄다. 가정폭력에 대한 효과적 대응 매뉴얼은 이미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선 미네아폴리스 실험을 통해 가정폭력에 국가 사법권이 적극 끼어들고,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법부는 가정폭력에 관한 한 총체적으로 무능하다. 박근혜 정부의 사회 정책 일성이 가정폭력을 포함한 4대 악 근절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가정폭력특례법’ 자체의 모순을 지적한다. 이 법의 목적이 가정의 보호와 유지를 추구한다는 게 걸림돌이라는 거다. 매일 가족을 위협하는 남자의 가정이 보호돼야 하는가에 대해 이젠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피해자의 인권 보호와 폭력을 대물림할 위험에 놓인 아이들의 인성 보호가 우선돼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마누라와 북어는 두들겨 패야 맛’이라는 말이 전승됐을 만큼 가정폭력에 대단히 취약한 문화적 배경이 있다. 가정폭력은 기승을 부리는데 문제의식이 희박한 건 이런 문화적 잔재 때문이다. 이젠 사법부가 문화적 취약성까지 극복할 ‘창의적 반전’을 보여줘야 한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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