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無罪 확정된 '유서 대필'과 강기훈씨의 24년 고통

2015. 5. 15.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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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1991년 '유서(遺書) 대필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강기훈씨에 대한 재심(再審)에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했을 때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1·2·3심은 유서가 강씨 필적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鑑定) 결과에 따라 강씨가 유서를 대신 써준 것으로 결론짓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국과수와 사설(私設) 감정인들에게 필적 감정을 다시 의뢰한 결과 유서 필적이 강씨가 아닌 김씨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강씨는 이를 근거로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은 작년 2월 강씨에게 무죄판결을 내렸고 이번에 대법원이 이를 확정한 것이다.

애초 유죄판결이 재심에서 무죄판결로 바뀐 핵심 이유는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의 신빙성을 인정한 처음 판결과 달리 이번엔 그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고법은 "국과수가 유서는 속필체이고 김씨는 정자체라 비교할 수 없음에도 무리하게 감정을 시도했고, 유서의 '보'자를 '오'자로 잘못 본 착오가 있었으며, 김씨 필체의 고유 특징들이 유서에는 나타나지만 강씨 필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종전의 재심 판결은 유전자 검사 결과나 수사기관의 불법행위 같은 새로운 증거가 드러난 경우였다. 이번은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법관의 주관적(主觀的) 판단이 달라지면서 원래와 정반대되는 판결이 나왔다.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재판부마다 다를 수는 있다.

궁극적 진실은 강씨 본인이 아는 것이다. 재심 제도라는 것이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기 위해 사회가 합의한 절차인 만큼 강씨에게 내려진 재심 대법원의 무죄판결은 존중되어야 한다. 강씨는 지난 24년간 줄곧 무죄를 호소하며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 간암을 앓고 있는 강씨는 이날 대법원 재판에 나오지 못했다. 무죄판결이 난 이상 국가는 강씨에게 합당한 보상(補償)과 함께 명예 회복 조치를 해줘야 한다.

강씨에게 유죄를 내린 법관들도 법에 따라 양심껏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재판하는 것이 사법 제도의 기본 정신이다. 모든 법관은 자신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무겁게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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