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숙의 만남] 숭례문 제와장 한형준 옹

서화숙 선임기자 2013. 5. 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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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보수에 전통수제기와 2만3000장.. 기와쟁이로 살아온 보람 커"

손기와가 좋은 이유는

사람이 발로 이겨서 만들기 때문에공기가 들어가 가볍고 색깔이 달라문화재 복원에 쓰게 된다니 기뻐

젊은 사람에 인간문화재 줘야

1998년 다큐 보고 찾아온 김창대나 대신 문화재 전문가들 설득해잡상 원형 정리하고 전통 가마 재현

숭례문이 불탄지 5년3개월만에 새 모습을 선보였다. 국보 1호가 돌아왔다고 반기는 소리에 오래된 건축물을 너무 서둘러 수리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섞여있지만 어디서 들어도 더 좋아진 부분으로 꼽히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기와. 그동안 우리나라는 문화재 보수에조차 공장제 기와(기계기와)를 써서 전통기와로 된 은은한 회색 지붕을 보기 흉한 시커먼 색으로 바꿔놓았다. 광화문과 숭례문을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면 기계기와와 전통수제기와가 아름다움에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한눈에 보인다. 한옥지붕의 색채감은 산으로 둘러싸인 옛 서울을 구성하는 아름다움의 절반이었고 고층빌딩이 많아진 요즘은 더욱 절실해진 미감이다. 전통에는 있었으나 오래 버려두고 살았던 아름다운 건축소재가 수제기와이다.

97년 보수공사 때에도 기계기와를 썼던 숭례문에 전통수제기와 2만3,000장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가난 속에서도 전통방식을 지켜온 제와장 한형준(84ㆍ중요무형문화재 91호 기능보유자)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98년 다큐멘터리를 보고 한옹을 찾은 후 스승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문화재 현장에 적용시키려 애쓴 제자 김창대(41ㆍ전수조교)씨가 있었다. 말솜씨 없는 스승을 대신해서 수제기와를 쓰자고 문화재 전문가들을 설득하고 분실된 잡상의 원형을 찾아서 정리하고 전통기와가마를 재현하는 것까지를 성사시킨 게 그였다. 스승은 "인간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를 나같은 늙은이 말고 젊고 똑똑한 사람을 줘야 혀"라고 말하고 제자는 "선생님이 계신데 내가 어떻게 나서냐"고 말하는 사이라 스승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제자의 설명(괄호안)으로 보완했다.

-숭례문 보신 소감이 어떠셔요?

"좋지요. 옛날에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기와쟁이라고 해서 백정 같은 상놈 취급을 받았거든요. 이제는 선생님 소리 듣고 숭례문 기와까지 만들었으니. 그동안은 문화재에도 손기와(그는 수제기와를 이렇게 불렀다)를 안 썼어요. 내가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88년에 됐어도 나라에서도 기계기와가 더 좋다는 말을 믿고 경복궁에도 광화문에도 다 기계기와가 들어갔단 말이에요. 수원 화성은 해달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숭례문 하느라 못해줬고. 이제부터는 문화재는 손기와를 쓴다니 그게 좋지요."

-손기와가 더 좋은 게 뭔가요?

"이게 전통기와예요. 색깔이 다르지요. 비가 와서 씻어지고 보면 삼색이 나온다 그러잖아요. 검은 색, 회색, 희부더한 색. 기계기와는 색깔이 시커멓기만 해요. 그리고 손기와가 더 가벼워요. 기계기와는 흙을 기계로 눌러서 똑같이 잘라낸 거니까 깡깡하거든요. 수제기와는 사람 발로 이겨서 하니까 공기가 많이 들어가 그런가 더 두꺼워도 더 가벼워요. 토기가 숨쉰다 그러잖아요. 숨쉬는 기와요. 기계기와는 기계로 찍어냈으니 모양이 똑 같은 게 더 좋을랑가."(기와가 가벼우면 지붕 하중이 줄어들어 목조건축물이 변형없이 더 오래 잘 유지된다. 형태도 모든 걸 재현한다.)

-기계기와랑 손기와가 왜 색깔이 다르지요?

"기와는 나무 연기로 옷을 입혀요. 그런데 기계기와 만드는 사람들은 별걸 다 때요. 타이어도 때고 기름도 때고 헌옷쓰레기 태우는 집도 있어요."(나무를 불완전연소시켜 탄소가 기와에 막을 형성하는 것으로 침탄기법이라 불린다. 기계기와는 가스로 굽고 탄소를 주입하기 때문에 색이 똑같이 짙게 나온다.)

-문화재라면 전통 방식의 기와를 써야 할 텐데 왜 지금까지는 그게 안됐던 거지요?

"기계기와가 더 튼튼하다고들 그랬지요. 가격도 손기와는 비싸고 이익도 안나고."(수제기와가튼튼하지 않다는 오해를 푸는 게 제일 힘들었다.)

-어떻게 기와일을 시작하셨습니까?

"내가 나주 사람이에요. 형제가 둘인데 형님은 집에서 농사를 짓고 나는 이모부가 보성에서 기와공장을 해서 열 네살 때 그리로 갔어요. 배운 것도 없고 가난하니까 일도 배우고 먹여주고 명절에는 차비 줘서 보내주고 1년에 옷 두 벌은 해준다고 해서 갔어요. 그때는 기와기술자가 되면 공장에서 서로 데려가려는 시절이었어요. 기와일은 흙을 이기는 흙꾼, 통(기와모형틀) 들고 다니며 기와 찍는 통꾼, 불 넣는 화부, 세 가지로 나누는데 화부가 제일 기술자에요. 일은 흙꾼이 제일 된데 돈은 제일 헐하게 받고요. 나는 이숙(이모부)이 데려갔으니까 처음부터 화부 일을 배웠어요. 그런데 3년을 배워도 1년에 옷 두 벌 주고 부려먹기만 해요. 형님은 일본 군대에 끌려【?농사일 할 사람은 없지 기와일은 힘들지, 이 참에 잘됐다고 집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몇 달도 안되어 해방이 되었단 말이에요. 기와 일이 늘어나니까 9월엔가 이숙이 찾아왔어요. 하루에 쌀 닷 되를 줄 테니 일하러 오라고. 그때는 상일꾼이 쌀 한 되를 받을 시절이었어요. 화부는 1년만 일하면 논 서 마지기를 샀어요. 그래서 다시 기와일을 시작했어요. 불을 볼 줄 아니까 나만한 기술자가 없었던 거예요. 공장(기와가마)도 장흥으로 옮긴다 하더라고요. 보성은 추운데 여기는 따습지 그때부터 여기서 쭉 지내게 된 거에요. 6.25가 터지면서 이숙은 고향인 광주로 돌아간다고 나한테 밀린 임금 대신 공장을 가지라 했어요. 그때부터 내가 여기서 살게 됐어요. 여기서 고향을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하니까 못 가겠더라고요. 하루는 이숙이 데리러 왔어요. 외가집이나 우리집이나 나 죽여서 어디 쳐박아 뒀느냐고 조지는 통에 날 찾으러 왔어요. 내가 안 간다면서 이숙보고 가기 전에 두 굴만 불을 때달라고 했어요. 그때야 내가 불을 어떻게 때는지 확실히 알았어요."

-기와 흙은 좋은 게 따로 있어요?

"진흙에 모래가 적당히 섞인 게 좋아요. 순전히 진흙이다 하면 모래를 10분의 2 정도 섞어요. 장흥은 따로 섞을 것도 없이 여기 흙이 그러니까 좋다는 거지요. 진흙이면 색깔은 검든 희든 황토든 상관없어요. 기와색은 불로 내는 것이니까."(모래 중에도 석영질 모래가 15%는 있어야 기와가 터지지 않고 전통기와의 아름다운 은회색이 나온다. 규소질 모래는 터진다.)

-그래서 불 피우기가 제일 중요한 거군요.

"불 한번 잘못 피우면 통째로 버려야 하니까요. 1,100도를 내야 돼요. 고래 이쪽부터 저쪽까지 똑같이 불이 들어가야 기와가 잘 익어요. 피움불 초불 중불 대불까지 24시간 잠도 못 자고 지켜서 불을 지피다가 마지막에 통나무로 막음불을 해요. 대불이 활활 타고 있을 때 통나무를 채워 넣고 불을 붙인 다음 흙물을 찌끄려서 가마를 공기 한 점 안 새게 꽉 막아요. 그러면 안에서 통나무가 타면서 연기가 기와에 씌는 거지요. 막음나무를 잘해야 기와색이 좋지. 사흘 뒤에 가마를 열어보면 통나무는 좋은 숯이 되어 있고 기와가 오리알색이랄까 꿩알색이랄까 그렇게 나오면 잘된 거지요. 기와 사이에 공기 길을 잘못 내거나 덜 익은 게 있으면 얼룩덜룩하지요."

-나무는 특별히 쓰는 나무가 있어요?

"소나무가 제일 좋지만 귀하니까 아무 나무나 써야지. 버드나무는 온도가 안 올라가서 못 써요. 불은 빨갛다고 좋은 게 아니예요. 오히려 좋은 불은 희부끄름하달까."

-기와 만들 때부터 완성까지 며칠 걸려요?

"며칠이라 장담할 수 없지요. 흙을 다지는 데 하루, 기와를 빚는데 하루, 건장치는(윗부분을 말리는) 데 이틀, 말리는 데 사흘, 불 때는 데 하루, 마감불 피우고 가마 막아서 사흘, 최소한 열 하루는 있어야 하는데 비라도 오면 못 말리니까. 1,000장 만들어놓고 다 버린 적도 있어요. 지금은 비닐이라고 있지만 그때는 가마니때기로 덮으니까 큰 비 오면 다 버려요. 말리는 건 시간을 정하는 게 아니라 빛깔 보고 정하는데 암만 못 잡아도 닷새는 잡아야 해요. 흙도 밟아주고 깨끼질이라고 돌멩이가 하나도 안 들어가게 깰줄로 일일이 잘라보며 해요. 만드는 건 통이 무거워서 두 명이 통 들고 다니며 하는데 부지런히 하면 하루에 100통, 400장까지 뺄 수 있어요. 옛날에는 가마에서 한번에 1,500장쯤 구웠지요."(숭례문 기와는 2011년 2월부터 제작에 들어갔는데 작년과 재작년 날씨가 비가 많이 와서 작업이 오래 걸렸다. 숭례문 기와를 위해 조선시대에 쓰던 경사형 가마인 등요기와가마를 2010년 7월에 장흥에 먼저 한 개를 복원했다. 한형준 선생이 해보니 문제가 없어서 전통학교에 세 개를 더 만들었다. 한번에 800~900장을 구웠다. 가마가 너무 크면 불이 고루 잘 안 온다.)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예요?

"내가 다리를 못쓰니까 (제자) 창대가 중간에 다 알아서 하느라 힘들었지."(전통기와를 써야 한다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게 설득이 안되니까 흙 살 돈도 나무 살 돈도 제 때 오지 않아서 만드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그러나 전통가마까지 세우고 수제기와를 써야한다는 것을 알아준 게 또 문화재청이다.)

-평생 수제기와를 만들면서 가장 좋았던 시절은 언제예요?

"박정희 때 잠깐 좋았다가 영 죽어버렸지. 새마을운동 하면서 지붕개량 하라니까 초가를 기와로 바꿨거든. 그런데 금방 슬레이트 지붕 나오지, 시멘트기와 나오지. 그때 죽어버린 것이 이때까지 죽었어요. 장흥만 해도 손기와하는 집이 열 군데가 넘었고 우리 공장도 사람이 열댓명이 일했어요. 그런데 다 없어지고 전국에 나 하나 남았단 말이에요."

-전통건축물 보수에는 많이 필요했을 텐데요.

"낯만 내지, 안 쓰더라고. 전통기와 올린 곳에 태풍이 나면 부서진 거나 조금 構?아예 새로 보수하는 건물은 기계기와를 썼어요.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요."

-문화재에도 안 쓰니 돈은 안 되는 일이었겠어요.

"잘 될 때 돈을 모아두어야 하는데 내가 어리숙해서 못 모았어요. 사기도 많이 당하고 이숙한테 물려받은 가마도 2004년에 이수자까지 시켜준 사람이 빼앗아 간 셈이예요. 그때까지도 땅주인은 따로 있었어요. 그랬더니 내 이름으로 땅을 사야 한다고 자꾸 데리고 다녀요. 돈은 자기가 댈 테니 공동명의로 하자고. 그래서 차라리 이 땅을 내가 소개하면 싸게 살 거라고 땅주인을 소개해줬더니 자기 이름으로 땅을 사고는 다른 제자들은 오지도 못하게 해요. 나만 와서 일을 하래요. 그래서 발을 끊었지요. 딸 여섯이 막내만 대학을 나오고 다 중학교까지만 보냈어요. 내가 다리가 아픈데도 치료를 못해서 걸어다니질 못해요."

- 그래도 요즘은 기와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전통문화학교에서 학생들이 많이 와요. 우리 창대가 문화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니까 일이 급할 때는 학생들도 보내주고. 그런데 창대 같은 사람은 없어. 처음에 디자인학교(부산디자인학교)에서 왔다길래 돈도 안되고 돈도 못 준다, 밥은 먹여주고 옷은 젖으면 빨아주겠다고 하고 시작했어요. 주말마다 이 방에 와서 밥상 놓고 공부했어요. 고생을 하면서도 얼마나 열심인지 내가 그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요."(부산공예학교에서 도자기 전공해서 전국기능경진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바람에 부산시 공예학교, 지금의 부산디자인학교에서 도자기를 가르쳤다. 부산시 공무원일 때 배우러 왔다. 선생님이 다리가 아프고 자꾸 기력이 떨어져서 마음이 아프다. 전통기와가 널리 쓰이는 걸 어서 보여드리고 싶다.)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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