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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오종석] 첸쉐썬이 존경받는 이유

국민일보 | 입력 2009.11.05 19:01

 




중국의 국보급 원로 과학자 첸쉐썬(錢學森)이 지난달 31일 98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중국 대륙이 애도 분위기에 빠졌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등 중국 지도부는 그의 타계 소식에 일제히 깊은 조의를 표했다. 인터넷에는 누리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 언론들은 연일 추모 특집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6일 장례식이 거행되는 그에 대해 중국인들은 '중국 우주항공의 대부' '과학 대사(大師)' 등으로 부른다. 첸 박사의 업적은 대단했다. 그는 중국의 원자탄과 수소폭탄 개발, 그리고 인공위성 발사에 있어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중국 내 첫 원자탄(1964년 10월) 및 수소폭탄(67년 6월) 실험과 첫 인공위성(70년 4월) 발사 성공 뒤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후 주석이 지난 1월 직접 그를 병문안할 정도로 그의 공적은 컸다. 원 총리도 지난 8월을 포함해 총리 재직 시 네 차례나 첸 박사의 자택을 찾아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는 위대한 업적보다 애국심과 절제된 생활, 그리고 겸손함에서 비롯됐다.

상하이 자오퉁(交通)대를 졸업한 그는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 공대 등에서 연구한 뒤 38년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항공우주 및 수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55년 귀국할 때까지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에서 미사일 개발에 참여하는 등 핵심 두뇌로 활동했다.

그는 20년 동안 미국에 있었지만 중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뇌 유출을 막기 위해 미 정부에서 최고의 대우 등 조건을 내걸며 각종 회유를 했지만 설득할 수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의 모든 것은 조국으로 돌아가 인민을 위해 일하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다. 나는 중국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고의 학자이면서도 절제된 삶을 살았다. 특히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의 "내 성이 돈을 뜻하는 첸(錢)이지만 나는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널리 회자된다. 60년대 초부터 타계할 때까지 줄곧 자신이 일해 온 중국항톈과학공업그룹 내 사원 숙사 같은 작은 주택에서 살았다. 수차례 좋은 주택을 지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이미 일반 인민과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며 동의하지 않았다. 연구 성과로 100만 홍콩달러(1억5200만원)의 상금을 받자 곧바로 서부의 사막관리 사업에 기부했다. 원고료 등 수입은 농공 자녀들 장학금으로 종종 내놓았다.

그는 또한 겸손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다. 64년 한 지방대 학생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발표한 논문 중 한 문장에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자 "나의 잘못을 지적한 것에 매우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학생의 지적을 그대로 학술지에 게재했다. 지난해 관영 중국중앙(CC)TV가 자신을 '중국을 감동시킨 10대 인물'에 선정하자 그는 "위대한 것은 내가 아니고 중국과 중국 인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자신에 대한 칭송이 이어질 때 "나는 창해일속(滄海一粟)에 불과하다"면서 "원자탄이나 인공위성은 수천명에 이르는 과학자의 합작 결과이지 어느 한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자신을 낮췄다. '미사일의 아버지' 등 자신의 업적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았다. 국방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 국무원 학위위원회 위원, 국가발명상 평가위원, 각종 학술 고문과 명예회장 등 그에게 많은 직위가 제안됐지만 그는 거부했다. 그는 퇴직 후 많은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첸 박사와 같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베이징=오종석 특파원 js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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