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으로 달뜬 친구에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말해주면 솔깃해 한다. 사랑에 눈 멀어 '하면 된다'는 말밖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일이 잘 풀리면 '내 덕'을 내세우겠지만, 백 번쯤 찍다 지쳐 억장이 무너졌더라도 해 줄 말은 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옛말이 그것이다. 은근히 '네 탓'을 내비치며 왜 실패했는지를 따지느니 '신포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출발 하라고 말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말이다. 사람의 일에는 하기 전엔 그러해야 할 구실이 있고, 벌어지고 난 뒤엔 온갖 미련과 미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위안이 뒤따른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고 부추기다가도 돌아서선 '넘치는 건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고 하는 게 사람이고 사람의 말이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도, '지옥으로 이르는 길은 온갖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는 경구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래서이다.
국민 가슴 태운 국보1호 화재
숭례문의 화재가 모두의 가슴을 새카맣게 태워버렸다. 국보 1호의 잿더미 위로 억장이 무너진 사람들의 말이 쏟아지고 있다.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누구든 잡아 볼기짝을 내리치고 싶은 분노와 왜 우리는 이 지경까지 왔는가라는 미련이 뒤엉키고 있다. '~라면'이란 말이 끓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가 2006년 3월 숭례문을 시민에 개방하지 않았더라면, 개방을 하더라도 문화재 보호를 위한 대책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여론을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무시하지만 않았더라면, 그 흔한 화재경보기와 스프링클러라도 설치했더라면, 일자리 늘린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마당에 야간 경비원 한 명이라도 두었더라면, 화재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초기 화재 진압이라도 제대로 했더라면, 화마에
낙산사를 잃었을 때 문화재 관리의 '외양간'을 고쳤더라면….
오죽하면 '~라면'을 끓이고 있겠는가. 다 부질없는 일이다. 600년 풍상을 견딘 누각은 이미 무너졌다. 목재 유물의 최대 적이 화마라는 사실은 문화재청도 알고, 남대문 개방을 청계천과 함께 역점사업으로 추진했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도 몰랐을 리 만무하다. 문화재란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뜻하며, 국보란 국가가 보존을 책임지는 문화재라는 것 또한 초등학생도 안다. 문화재가 근대 국민국가의 출현과 함께 '만들어진 개념'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국가와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상징으로 기능함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런데 지키지 못했다.
숭례문 개방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국보 1호를 시민의 품으로 되돌린다는 취지는 외려 칭찬할 만하다. 문제는 관리다. 만전을 기해도 모자랄 판에 활짝 열어만 놓고 보호와 관리에서 손을 놨다면, 이번 참변의 불쏘시개는 '개방의 선의'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일만 벌여놓고 방치한 것이다. 숭례문 화재는 '방치된 개방의 참담한 귀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말이 차고 넘치는 것은 실수가 반복된다는 뜻이다. 개방을 하면 문을 잠갔을 때보다 더 엄중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표로 먹고 사는 정치인들이 특히 그렇다. 개방은 보이지만 관리는 보이지 않는다. 개방은 생색이 나지만, 관리는 잘해야 본전이라고 여긴다. 시장개방의 불가피성을 목청 높이던 이들이 숭례문 주변에 늘어나는 노숙자에 대해선 고개를 돌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자고 입에 거품을 무는 이들도 사후에 '~라면'은 끓일 수 있을지 몰라도, 관리에 관한 한 물만 뿌려댔을 뿐 불길을 잡지 못한 소방당국과 다를 것 같지 않다. 따뜻한 정책을 표방한 차기 정부는 시장이 알아서 서민을 섬길 것이라고만 말한다.
'관리 부재'의 비극 남겨둬야
벌써부터 숭례문 복원 얘기가 나오고 있다. 옛 모습을 되살린다고 복원이 아니다. 숭례문을 태운 것은 전쟁도 천재지변도 아니다. 잿더미 자체가 우리 시대의 역사가 됐다. 보기 흉하더라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래서 두고두고 관리 부재와 방치의 비극을 눈으로 보여주고, 말이 필요없게 해야 한다.
〈 유병선 /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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