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조선 세관 두모진 / 정남기

2007. 4. 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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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관세가 부과된 곳은 1878년 부산이었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으로 개항을 하면서 일본에 무관세 통상을 보장했다. 일본의 강압 때문에 관세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맺은 일종의 자유무역협정이었다. 조선은 뒤늦게 잘못을 깨달았으나 일본인에게 세금을 부과할 방법이 없었다. 대신 일본과 교역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세금을 매겼다. 나름대로 조약을 피해 가는 묘수를 동원한 셈이다. 이때 세관이 설치된 곳이 동래부사 휘하에 있던 두모진(豆毛鎭)이다. 당시는 해관(海關)이라 불렀다.

60냥짜리 소가죽 100척에 14냥(23%), 10냥짜리 양가죽에 3냥(30%) 등 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됐다. 효과는 컸다. 거래 물품 가격이 급등했고, 일본 상인들이 동래부에 난입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은 내국인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므로 일본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태도를 취했다. 결국 일본 군함이 동원됐다. 일본군은 부산 앞바다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병사들을 상륙시키는 등 무력시위를 계속했고, 조선은 굴복했다. 두모진 해관은 이렇게 해서 9월28일부터 12월19일까지 석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조선은 1883년에 부산, 인천, 원산에 정식으로 해관을 다시 설치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세관 업무를 몰라 해관장을 모두 영국인으로 임명했으니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타결해 스스로 문을 열었다. 득실을 놓고 논란이 많다. 하지만 개방의 효과는 협정문이 아니라 얼마나 내부 혁신을 이뤄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개혁이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전면 개방을 하면 안 된다. 반대로 전면 개방이 불가피하면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둘 다 아니면 조선 말기처럼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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