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칼럼] 하루키 현상

2007. 3. 2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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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교수신문>이 신진문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국내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외국 문인으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꼽혔다.

여기서 '과대평가'의 주체는 평단이 아니라 하루키를 사랑하는 국내 독자들인 것 같다. 국내 평단은 하루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평단은 국내 독자들이 하루키의 소설에 매료되는 이유를 주로 소비주의ㆍ감상주의ㆍ허무주의, 쉬움·가벼움·부드러움 등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음담패설'이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정말 그런 건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하루키 독자들이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으면서도 하루키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로 드는 '쿨(cool)'의 정체를 위와 같은 설명만으로 포착할 수 있는 걸까?

● 가벼운 감상주의 뿐일까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이른바 '쿨의 법칙'이라 부를 수 있는 걸 제시했다. 그건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그리고 모든 사물과 자신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를 둘 것" 등이다. 굳이 이 소설 안에서 '쿨'과 관련된 진술을 찾자면 다음 두 가지를 더 들 수 있겠다.

"일상생활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위선이든 위악이든 그건 그다지 대수로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극히 평범한 여자는 무엇이 공정하냐 아니냐보다는, 무엇이 아름답다든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것을 중심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법이죠. '공정'이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사용하는 말이에요."

물론 남자도 이제 더 이상 '공정'을 사용하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아니 '공정'은 신기루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정'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건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 자신의 일상적 삶을 껴안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일상적 삶에서도 심각성을 버리고 거리두기를 확보하는 건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을 차단하는 지혜가 된다.

이런 게 바로 '쿨'한 삶이다. '쿨'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하루키의 경우 의식적으로 일본 문학을 멀리하면서 영어로 된 책만을 읽으며 자랐으며, <상실의 시대>도 일부러 그리스·이탈리아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썼다. 그의 소설엔 '쿨'의 정신이 녹아 있다.

요즘 출판계에서 한국소설들을 압도하고 있는 일본 소설들을 모두 '하루키류'로 볼 순 없지만, 하루키마저 무겁다고 말하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있는 걸 보면 일본 소설 붐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아무래도 '쿨'인 것 같다.

'쿨'은 자본주의 발전단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형 '쿨'을 수용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할 수도 있다.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감정을 발산하는 문화인데다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일본보다 더 많은 나라이므로, 그 반작용으로 '쿨'의 수요는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쿨'은 감정의 처세술이다. 사회진화론의 풍미는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날로 극심해지는 약육강식(弱肉强食)·우승열패(優勝劣敗)·적자생존(適者生存) 풍토에서 '쿨'은 반드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자기방어 기제가 되고 있다.

● 소설 속의 '쿨'한 정신

공적 영역에서조차 '쿨'은 새로운 미덕으로 떠올랐다. 분열과 갈등이 고조되면서 '참여'와 '열정'이라는 아름다운 말조차 타락하는 사태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는 사회에서 '쿨'이 소통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각기 생각을 달리하는 세력들의 뜨거운 애국충정 경쟁이 오히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역설이 '쿨'의 수요를 키우고 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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